엊그제가 육이오 기념일이었다. 그날은 종일 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의 '육이오 노래'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240만명의 양민들이 학살당하고 150만명 가까운 군인들이 전사한 육이오를 세계는 지금껏 'Forgotten War', '잊혀진 전쟁'이라 불러왔고 최근에 이 명칭을 바꾸자는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한다.
'forget'은 고대영어로 'forgietan'이라 했고 무엇을 놓치거나 놓아버린다는 의미였다. 현대 영어로 'drop the ball', 하면 실수를 하거나 무슨 일을 잡친다는 뜻인데 'forget'은 그런 상황이 머리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연이다. 기억을 놓치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지만 야구장에서 공을 놓친다면 그건 씻을 수 없는 실수다.
'memory'는 전인도유럽어의 'men-'에서 유래한 말로서 생각하다, 혹은 'mind' 즉 '마음'이라는 뜻이었다. 'mind'와 'memory'가 같은 말 뿌리에서 생겨났으니 이것은 마음을 기억과 심리작용의 용기(容器)로 보는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마음을 비우라고 서로에게 강도 높게 교시한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다시 '영양가' 있는 그 무엇으로 마음을 채우겠다는 자본주의적인 의도를 폼나게 감춘 말이다. 예컨대 도 닦는 도사들은 마음을 비운 후 도를 깨우치는 노하우로 마음을 가득 채울지어다.
'Forgive and Forget'는 용서하고 잊어버리라는 금언이다. 용서 못할 과거의 상처를 실감나게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하여 혈압과 근육의 긴장도가 높고 두통의 빈도가 심하다는 연구 결과가 근래에 주목을 받고 있다.
'forgive'의 고대영어 'forgiefan'은 용서한다는 뜻 외에 포기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서구적인 의미에서 용서한다는 것은 자기 감정을 포기함을 전제로 한다.
용서(容恕)라는 한자를 잘 들여다보라. '얼굴 용'과 '용서할 서'로 이루어진 이 단어에는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가 서로를 '쪽 팔리'지 않게 해 주려는 동기의식이 숨어있지 않은가. 서(恕)는 같을 여(如) 밑에 마음 심(心)이 합쳐진 문자다. 如? 여자의 입? 여자가 하는 말? 우리의 용서는 포기보다 상냥한 말투를 요구한다.
프랑스의 여류화가 마리 롤랑생은 혼자인 여자보다, 쫓겨난 여자보다, 심지어는 죽은 여자보다 '잊혀진' 여자가 더 불쌍하다는 내용의 시를 남겼다. 당신은 사랑했던 여자를 잊지야 않겠지만 가슴의 상처는 잊을 각오를 해본 적이 있었던가.
십여 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Forget about it'라는 슬랭이 있다. 이 말은 이탈리아 악센트를 넣어서 강하고 음산하게 발음해야 제격이다. 더러는 스펠링조차도 'Fuggeddaboudit'로 표기한다. 그 뜻인즉 첫째, '말도 마!' 하는 역설적 동의를 뜻하는 경우가 있고 둘째, '집어치워!' 라는 혐오감의 표시이고 셋째로는 '잊어버려!' 라는 직설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당신은 양키 친구가 "It's terribly hot today." 하면 여기에 열거한 첫 번째 뜻으로 "Oh, forget about it." 하며 세련되게 손사래를 칠 일이다.
아, 아 잊으랴 하는 육이오 노래의 시작부분이 귓전을 맴돈다. 당신은 혈압상승이 두려워서 육이오를 용서하고 잊을 수 있겠는가. 북한이 61년 전에 자행한 파렴치한 남침을 그들의 얼굴을 봐서 곱상하게 입을 모아 역사적 상처의 끈을 놓을 수 있겠는가. 유대인들이 독일인들에게 선포했듯이 "We forgive you, but we will never forget." 할 것인가. 혹은 'Fuggeddaboudit!' 하며 위의 두 번째 뜻으로 힘차게 소리치겠는가.
© 서 량 2011.06.25
-- 뉴욕중앙일보 2011년 6월 29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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