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33. 노래 값

서 량 2011. 5. 30. 12:18

 노래와 놀이와 노름은 다같이 '놀다(play)'에서 파생된 말이다. '노래''바둑아 바둑아 이리와 나하고 놀자'던 옛날 국정 국어교과서의 그 '놀자'와 말 뿌리가 같다.

 

 'play' 'playboy'라는 단어에서 뭇 여성들의 정숙한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play the piano'에서처럼 악기를 연주한다는 예술적인 의미로도 응당 쓰인다. 'play'라는 개념이 스포츠 정신에 입각한 공놀이에서 '연극'이라는 예술 장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인류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는 모두 일하기보다는 놀기를 좋아하는 천성을 타고 난 것 같다. 당신도 아마 기억할 것이다. 어릴 적 당신이 양지 바른 뒤뜰에서 심취했던 소꿉장난과 신랑각시 놀이를.   

 

 'sing'은 어떤 소리나 말을 규칙적으로 반복한다거나 '주문을 외다(chant)'는 뜻의 고대영어 'singan'이 변한 말이다. 고대인들이 푸념처럼 읊던 주문이 노래의 시초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singan'에는 운다는 뜻도 있었는데 양키들은 새가 노래한다 하고 우리는 새가 운다고 하는 말 습관의 차이가 흥미롭다. 노래건 울음이건 커다란 소리가 귓전을 때리기는 마찬가지인가보다.

 

 'chant'에서 이태리의 칸초네(canzone)와 프랑스의 샹송(chanson)이라는 말이 거의 동시에 16세기 말경 탄생했다. 그리고 마법에 홀린다는 뜻의 'enchant'라는 동사도 나중에 생겨났다.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노래에는 사랑처럼 사람을 홀딱 홀리게 하는 마력이 있으려니.

 

 음악(音樂)은 문자 그대로 소리의 즐거움이다. 이때 악()은 노래 악, 즐길 낙(), 좋아할 요, 등등으로 풀이되면서 '동거동락(同居同樂)은 물론 산과 물을 좋아한다는 의미의 요산요수(樂山樂水)에도 아주 점잖게 들어가는 한자어다.

 

 악기를 절묘하게 다루어서 청중을 즐겁게 하는 사람을 연주가라 하고 노래로 남들의 심금을 울리는 예술인을 성악가라 부른다. 그러나 당신과 나처럼 소탈하고 대중적 기질이 농후한 사람들은 근엄한 성악가보다 다정한 목소리를 연상시키는 '가수(歌手)'를 단연 선호한다.

 

 가수는 노래 솜씨가 생명이다. 가수라는 말에는 당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한 수 배웠습니다." 할 때 쓰는 '손 수()'자가 들어간다. 요사이 항간에 시끄러운 MBC TV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에서 남의 노래를 솜씨 있게 부름으로써 혹독한 노래자랑에서 탈락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몇몇 가객(歌客)들을 보았다.

 

 그들은 눈물 콧물을 쥐어짜는 음산한 가창력과 무대매너로 놀이(play) 위주의 노래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질리고 겁나게 한다. 그런 살벌한 장면을 보노라면 삶이란 살아있다는 축복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버둥거리는 기능경쟁의 전쟁터라는 깨달음 때문에 당신은 그야말로 '떡실신'을 하기 일보직전이다.

 

 'for a song' '헐값으로'라는 관용어다. 노래 하나 불러 주면 그 대가로 물건을 준다니, 이것은 얼마나 후한 양키들의 인심인가. 그러나 무슨 물건을 한 곡의 노래 값으로 산다는 직역은 우리 귀에 얼른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He bought it for a song'을 우리말로는 '그는 그걸 똥값으로 샀다'라 옮겨야 훌륭한 번역이 된다.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을 싸게 산 결과로 발생하는 부()의 축적을 왜 양키들은 노래에 연결시키고 우리는 하필이면 똥에 비유하는가. 왜 우리는 수명장수한다는 표현을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산다고 입가에 웃음마저 흘리면서 말하는가.

 

 우리는 왜 신나고 즐거운 노래보다 처연한 아픔을 주문처럼 읊조리는 노래에 눈물을 훔치며 기립박수를 보내는가.

 

 

© 서 량 2011.05.29

-- 뉴욕중앙일보 2011 6 1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