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20. 사랑의 약속

서 량 2010. 11. 29. 07:42

 ... and as he moved, a small provocative smile curved her lips. "Going my way, soldier?" she murmured. -- ...그리고 그가 움직이자 약간 도발적인 미소가 그녀의 입술을 맴돌았다. "병사님, 제가 가는 길로 가시겠어요?"라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

 

 이 글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영어 교과서에 나왔던 'Appointment with Love: 사랑의 약속'에 나오는 일부분이다. 엊그제 추수감사절에 친지 몇 명을 초대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밑도 끝도 없이 그 문장이 기억에 떠올랐다.

 

 이것은 북한의 김정일이 11 23일에 연평도에 포탄을 퍼부은 짓을 '도발' 행위라고 명명한 한국 언론에 대하여 얘기를 하다가 일어난 내 자유연상의 결과였다. 도발은 영어로 'provocation'이고 그 말의 형용사가 'provocative: 도발적인'.

 

 인용부분은 런던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뉴욕으로 이주한 여류작가 S. I. Kishor (1896~1977)의 단편소설에서 베껴왔음을 밝힌다. 1943년에 출간되어 지금은 단편소설의 고전이 된 그녀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조금씩 변형되어 'The Rose' 'The Test'라는 제목으로도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나와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한 공군 중위가 얼굴을 모르는 여인과 편지를 주고 받다가 뉴욕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에서 오후 6시에 만나기로 약속한다.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쉽게 알아보도록 옷에 장미꽃을 꽂고 나오겠다 한다.

 

 6시 정각에 한 미모의 젊은 여자가 입술에 '도발적'인 미소를 띄우며 군인에게 접근하고 바로 그 뒤에 볼품 없는 중년의 여자가 옷깃에 장미를 달고 걸어온다. 군인은 젊은 여자의 유혹을 마다하고 중년여자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식사를 같이하자는 청원을 한다.

 

 중년여자는, 저 앞에 걸어가는 젊은 여자가 부탁하기를 옷에 장미를 달고 있다가 한 군인이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말을 걸면 길 건너 레스트랑에서 자기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연을 전해달라고 지시했음을 실토한다. '사랑의 약속'은 이렇게 매콤하게 종결된다.

 

 나는 왜 북한이 남한의 공격심을 도발시킨 소식을 듣고 하필이면 그 옛날 그 문장을 기억에 떠올렸을까.

 

 '도발(挑發)'에는 본능을 건드리는 뉘앙스가 바닥에 깔려있다. 인간의 본능에는 자기방어 본능에서 파생된 공격성이 있고 종족보존을 위한 애욕이 있다. 도발이라는 개념은 이 두 가지 본능을 동시에 겸비한다. 그래서 도발적인 발언은 공격력이나 성욕을 충동질하는 막대한 위기감을 조성한다. 양키들끼리 몸싸움을 하려 할 때 'Do you want to f--ck with me?: 한 번 붙어 볼래?' 하며 소리치는 것도 심층심리에 잠재된 공격심과 애증(愛憎)이 뒤범벅이 된 표현이다.

 

 'provoke' 15세기 초에 출현한 불어 'provoquer'와 라틴어 'provocare'의 현대어로서 'pro: 앞으로' 'vocare: 부르다'의 합성어다. 누구를 도발시킨다는 말에는 상대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부추기는 의미가 도사리고 있다. 'vocare'는 또 'voice: 목소리'와 어원이 똑같다. '소녀시대' 같은 보컬그룹의 'vocal'도 같은 어원이며 'vocation (직업; 소명)'이라는 말 또한 부름을 받았다는 뜻이다. 대저 사람의 목소리는 하늘의 부름을 반영한다.

 

 남은 일이라고는 남한과 미국을 도발하는 것 밖에 없어 보이는 북한의 김정일이여, 작금에 당신의 소명은 과연 무엇인가. 자신과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명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이 도발적인 판국에 어디 남한과 한 번 붙어 보겠다는 심사인가.

 

 

© 서 량 2010.11.28

-- 뉴욕중앙일보 2010 12 1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