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은 언행이 조신하고 근엄한 반면 서구인은 신중하지 못하고 가볍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것은 동양인들은 목에 힘을 주는 권위주의를 신봉하지만 양키들이 워낙 꾸밈이 없고 소탈한 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엄숙함이 지나치면 따분해지고 사람이 너무 꾸밈이 없으면 경박해 보일지도 모른다.
'가볍다(light)'는 고대영어의 'leoht'에서 유래했는데 '무겁다(heavy)'의 반대말로서 가볍고, 쉽고, 재빠르다는 뜻으로 16세기 초에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마저 파생됐다. 당신의 양키 친구가 "Don't think light of my feelings!" 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의 감정을 얕잡아 보는데 대한 항변으로 받아드리기를 권유한다. 그리고 누가 "I have a heavy date tonight." 라고 말한다면 오늘밤 그가 모종의 뜻 깊은 데이트를 하는 상상을 전개시켜도 무방할 것이다.
'heavy-hearted'는 마음이 무겁고 침울하다는 뜻이고 'light-hearted'는 가볍고 경쾌한 기분을 일컫는다. 이렇듯 우리는 때에 따라 무거운 것이 좋기도 하고 가벼운 것을 선호하기도 한다. 'light'는 '빛'이라는 명사로도 쓰인다. 빛보다 가볍고 재빠른 물질이 세상천지 어디에 또 있을까. 태초에 '빛이 있으라: Let there be light.' 했던 생명의 근원, 바로 그 짠한 빛!
2011년은 신묘(辛卯)년, 토끼띠의 해다. 토끼는 빠르고 경쾌하게 질주하는 동물이며 우리 동화나 민속전설에서 꾀가 바글바글하게 끓는 역할을 맡는다. 고구려의 설화에서 조선시대 판소리로 변형된 「별주부전」, 일명 「토끼전」을 기억하는가.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거북이가 토끼에게서 간을 강제로 장기기증 받으려 하자 간을 햇볕에 말리려고 꺼내놓고 왔다는 이유를 대고 줄행랑을 쳐서 목숨을 건지는 토끼의 임기응변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직한 호랑이를 시시때때 골탕먹이는 우리 동화 속 토끼는 또 얼마나 영특한가. 그러나 이솝우화의 「토끼와 거북이」에서 토끼가 타고난 능력만 믿고 자만심에 빠져 경기 도중에 낮잠을 자다가 꾸준히 땀 흘리며 자기 소임을 다하는 노력파 거북이와의 경쟁에서 패배 당하는 꼴은 또 어떤가.
루이스 캐롤의『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도 앨리스가 토끼 굴에 떨어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토끼는 우리의 환상을 자극한다. 부활절 무렵 'Easter bunny: 부활절 토끼'가 울긋불긋한 달걀을 바구니에 듬뿍 담고 등장한다. 토끼는 생장과 번식과 풍요의 상징이다. 1950년대에 창립되어 급기야는 전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Playboy' 월간지에 출몰한 꼬리가 탐스러운 여체의 'playboy bunny'들 또한 뭍 사나이들의 심금을 많이 흔들었다. 토끼의 풍성한 생명력을 그 누구도 외면하지 못한다. 우리 속설에 토끼띠는 이성관계를 각별히 조심하라는 권고가 있지 않았던가.
무겁고 신중한 거북이가 동양인의 언행을 대변한다면 가볍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는 서구인의 진취성을 묘사한다. 양키들의 의식 밑바닥에는 이념보다 현실에 입각한 꾀가 동짓날 팥죽 끓듯 부글거리고 있고 토끼 같은 원초적 기질을 서슴없이 과시하는 그들의 직설적 몸짓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1984년에 발간된 밀란 쿤다레의 대표작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같은 존재의식에다가 공자맹자적 권위와 격식을 적용시키지 않는 그들의 싱겁고 단순한 사고방식이 우리를 또한 놀라게 한다. 실존의 언덕길을 깡충깡충 뛰어가는 동양의 토끼띠들에게 부디 영광 있으라.
© 서 량 2010.12.26
-- 뉴욕중앙일보 2010년 12월 29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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