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우연히 윈스턴 처칠의 인용구를 훑어보다가 깜짝 놀라 무릎을 탁 친 적이 있다. "If you are going through hell, keep going: 당신이 만약 지옥을 지나가고 있다면, 계속해서 가십시오" 라는 그의 명언 때문이었다.
이 말은 역경에 처했을 때 도망을 치거나 풀썩 주저앉는 것보다는 계속 튼실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가다 보면 역경이 끝난다는 지혜와 의지력의 중요성을 당신에게 고취시킨다. '피와 땀과 눈물로' 2차 세계대전을 극복한 영국 수상다운 발언이다.
'hell'은 고대영어와 불어에서 'underworld: 지하세계'라는 뜻이면서 '막힌 장소'라는 의미도 있었다. 14세기 후반에 역경이나 나쁜 경험이라는 뜻이 첨가됐고 'Go to hell!: 지옥에 가라'는 식으로 한 인간을 저주하는 표현으로는 1596년경 쉐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쓰였다고 전해진다.
'hell'을 우리말로 지옥(地獄)이라 한다. 문자 그대로 땅의 감옥이라 풀이할 수 있는데 기원전의 중국 토속신앙과 불교와 도교가 비빔밥처럼 뒤범벅이 되어 생겨난 단어란다.
'hell'이 막힌 장소라는 뜻에서 'cell'도 유래했다. 세포는 벽돌처럼 사방이 제한된 생명의 기본단위다. 감옥소의 감방도 'cell'이라 한다. 어찌 보면 생명현상이란 일정 기간 동안 유폐된 공간을 견디어내는 감옥살이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대체로 감옥살이는 일정 기한에서 그치지만 영원한 옥살이라는 개념이 불교에 있지 않았던가. 이를 이름하여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 하는데 이를테면 고의적으로 부모를 살해한 죄, 혹은 부처에게 상처를 입힌 죄 따위를 범한 영혼들이 끝임없이 받는 끔찍한 형벌이다.
무간지옥은 불교의 팔열지옥(八熱地獄) 중에서 가장 혹독한 벌이다. 살아 평생 지은 죄로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고통을 받는 이 여덟 계급의 벌은 뜨거운 불길로 받는 3도 화상의 고통이다. 최신에 나온 연고를 아무리 발라도 소용 없다. 지옥은 지구의 속내처럼 화염이 득실거리는 차원에 존재한다. 의학적으로는 피부에 과도한 염증을 일으키는 일종의 열병이다.
실존주의의 거두 사르트르는 '지옥은 남들이다: Hell is other people'이라는 유명한 인용구를 남겼다. 이 말은 우리들이 자신을 비판하는 것보다 남들을 험담하기가 일쑤라는 뜻이다. 무의미하게 이 세상에 던져진 우리의 실존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가 하는 매우 진솔한 진술이다.
'극락길 버리고 지옥 길 간다'는 우리 속담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말은 착한 삶을 살지 않고 못된 짓만 골라하는 인생을 묘사하는 말 같기도 하지만, 안전하고 틀림없는 길을 가는 대신에 험난한 가시밭길을 택하는 사나이다운 모험심을 부추기는 격언이기도 하다.
당신도 한 번 생각해 보라. 기독교에서 천국이나 천당을 'heaven'이라 하지 않았던가. 고대영어에서 이 말은 '하늘' 혹은 '신의 처소'를 뜻했는데 신은 혹시 민들레 홀씨처럼 몸이 가벼운 관계로 하늘 쪽으로 둥실 두둥실 승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말로도 신을 하느님이라 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일부러 지옥을 지향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육중한 지구의 중력현상을 거부하면서 가볍고 홀가분한 의식상태를 추구한다. 그래서인지 'hell'이나 'cell'처럼 앞뒤가 꽉 막힌 감옥살이보다 사방팔방으로 경계가 없는 천국을 기린다. 당신과 나의 천국과 극락이란 북한 같은 폐쇄공간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하는 남한처럼 확 트인 공간이다. 속 시원한 자유의 시공이다.
© 서 량 2010.06.06
-- 뉴욕중앙일보 2010년 6월 9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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