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얘기

|환자얘기| 어느 양키 정신과의사 얘기

서 량 2010. 4. 14. 07:31

 칼 구스터프 융 (Karl Gustav Jung: 18785~1961)이 극구 주장했지만  당시 정신분석가들이 속시원하게 받아드리지 않은 학설 중에 '사회적 전염'(contagion)이라는 컨셉이 있었다.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너무 오래  상대하다 보면, 정신과의사가 정신적으로, 마치도 독감이 전염되듯이 환자의 미치광스러운 사고방식에 전염이 된다는 말이야. 좀 썰렁한 컨셉이라서 프로이드를 위시한 정신분석가들이 그 학설을 접수하지 못했지. 정신분석가들이 미치광스러워지다니. 이거 뭐야. 쪽 팔리잖아.  

 

 당신도 알다시피 쉬운 말로 유행이라는 게 있잖아?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도 사실은 어쩔 수 없는 동물왕국에 속한 군중심리의 노예라니까. 안 그래? 우리들끼리 말이지만, 노예처럼 편안한 삶이 세상에 어디 또 있을까. 그냥 묵묵히 아무런 창의력 없이 유행을 쫓아가면 되는 거 아니야?

 

 옛날에 내가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와 했던 양키 정신과의사가 한 놈 있었다. 나보다 한두 살 아래인 주제에 늘 내 앞에서 서너살 위인 척하는 열라 이상한 놈. 오래 전 일이라서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끽해야 한 20년 쯤 전일 거야. 당신은 얼른 안색을 바꾸면서 내가 20년 전에는 어땠을까, 하며 궁금해 할지도 몰라. 어떻긴 뭐가 어때. 지금이나 별 다름 없었지. 사람들이 날 보고 같은 동년배보다 한 20년은 젊어 뵌다고 그러잖아. 미안해. 너무 겸손하지 않은 말을 해서. 근데 내 말이 좀 혼동스럽지, 그치? 그렇다면 앞으로 20년 후에 지금처럼 보일거라구? 히히히.

 

 하여간 내가 아니꼬와 하던 그 놈하고 딱 둘이어 같는 엘레베이터에 탔다는 얘기야. 그놈이 내가 오른 손에 쥐고 있는 도서관 낙인이 찍혀 있는  「말러의 전기」라는 책을 보더니 즉설주왈, "나는 구스퍼트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라는 유태인 작곡가 없이는 의과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을 거야!" 하는 거 있지.  그때 나는 수면부족으로 쩔쩔매는 뉴욕의대 3학년 애들에게 <예술과 정신분석의 상호관계>라는 선택과목 강의를 하고 있었을 때였어. 그래서 그 밉살스러운 놈에게 나는 나대로 즉설주왈, 나는 "나훈아라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의대를 졸업하지 못했을 거야" 하며 엄숙하게, 아주 엄숙하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지.

 

 그랬더니 이놈이 하는 소리가 최근에 체코슬라바키아의 현대 작곡가에 '너후우나'라는 작곡가 이름을 들었는데 그사람이 바로 그사람이냐고 되묻는 거 있지. 킥킥. 어쩔까 하다가 하도 난처해서 얼떨결에 "나훈아는 한국의 엘비스 프레스리"에 해당하는 내 대학교 때 한국 가수라고 살살 눈웃음을 치면서 말했거든. 그리고 그의 별명이 "구스터프 나훈아"라고 큰 소리로 거짓말까지 했지. 잠깐 딴 소리지만 유명한 남자 이름은 왜 그렇게 뻔질나게 구스퍼프지? 푸하하하. 으흐흐. 

 

 그놈이 눈치는 빨라가지고 금방 내가 거짓말을 하는 줄로 알아차리더라구. 얼굴이 뻘게져서 디게 언짢아 하면서 전혀 웃지도 않는 거야. 고상한 사람은 함부로 웃지 않잖아. 허기사 그럴 때 웃을 수 있는 놈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그런 시건방진 말을 하지를 않았겠지. 지가 얼마나 고상하고 예술적인 청년이면 고생이 막급한 의대에서 공부를 하다가 이를테면 말러의 1번 '거인(Titan)' 교향곡 지루하기 짝이 없는 1악장이라도 들으면서 머리를 식힌 후 다시 공부를 했다는 말이지. 어걸 어쩌면 좋아. 폼나. 너무너무 폼나. 진짜 그런 적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걸 나 같은 외국인 의사한테 자랑을 할 건 또 뭐야. 안그래? 

 

 그리고 나서 나도 좀 후회했다는 사실을 당신에게만 밝히고 싶다. 이제 와서 어찌타 나는 구스터프 말러보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으로 내가 군대시절 초창기때 히트치기 시작한 나훈아를 더 후원해 줬을까 하는 의문점이 생기네. 별로 넓지도 않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말이지.

 

© 서 량 2010.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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