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얘기

|환자얘기| 불쌍한 리차드

서 량 2009. 9. 18. 19:56

 지난 2월에 <다섯 살 짜리 딸>이라는 제목으로 환자얘기를 쓴 적이 있는데 궁금해서 '목록열기'를 열어 보니까 바로 그 사연의 주인공 이름이 '리차드'잖아. 나 참 기가 막혀서, 그것도 모르고 리차드에 대한 얘기를 오늘 처음부터 쓸려고 했단 말이지.

 

 이게 즉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이 글이 바로 <다섯 살 짜리 딸>의 후편이라는 말.

 

 하여튼 간에 리차드는 그후 항우울제를 먹고 기분도 많이 호전되고, 워낙 착실하기로소문이 난 관계로 다시 자기가 하는 일에 복직이 됐고, 집 나간 와이프도 다시 기어들어 왔고, 다시 잘 살아보자 하면서 둘이 서로 부등켜 않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대. 어때, 해피엔딩 같지?

 

 문제는, 리차드가 기분이 밝아지고 자기 주장도 곧잘 하게 되면서부터 부부간에 커다란 불화의 씨가 싹트기 시작한 거라. 그가 좀 기운을 차리니까 와이프는 와이프 대로 맨날 침대에 자빠져서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면서 티브이를 보며, 종일토록 뼈빠지게 일하고 집에 온 리차드에게 집안 청소며, 다섯 살 짜리 딸 기저기를 갈아라, 설겆이를 해라, 하는 요구를 더욱 더 강화시켰다는 거지. 또 한편 리차드는 이제 자신감도 생기고 판단력도 좋아지고 한 마당에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더 심하게 생긴 거야. 그래서 그들은 부부싸움의 빈도가 더욱 잦아졌지. 이럴 때는 배경음악이 재즈로 나와야 해. 아주 빠른 속도로다가. 특히 드럼 소리가 크게 들리게!

 

 급기야 엊그제 리차드 와이프는 리차드에게 "당신은 정신치료를 받고 난 후 우울증이 낫기는 커녕 증상이 더 악화됐어요. 그 따위 듣지도 않는 약은 더 이상 먹지 마세요. 그 한국의사 순 엉터리에요." 라고 선언한다. 리차드는 리차드대로 내게 "이제는 마음도 밝아졌고 자신감도 생기고 해서 제 우울증이 다 나은 것 같으니 약을 끊겠습니다" 하더니, "그 대신에 와이프의 제안대로 우리는 결혼상담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 동안 저를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며 아, 글쎄 더 이상 내게 오지 않겠다는 거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좀 혼동이 와? 전혀 안 와?

 

 부부 중에 어느 한쪽이 우울증이 있는 것은 그게 다 그럴듯한 내막이 있어서고 잘났건 못났건 결혼을 유지하기 위한 보호적인 메커니즘일 때가 참 많아. 근데 한 쪽이 더 이상 빌빌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이 돼서 떳떳한 발언을 하기 시작하면 상대는 어떻게 해서라도 지가 편안한 옛날 상태로 되돌아 가고 싶어서 안달을 부리고 지랄발광을 한다는 거라. 사람이란 참으로  이기적인 동물이다.

 

 당신 생각은 어때. 이거 참 슬픈 얘기지? 나는 참 슬프다. 이런건 국제 인권윤리위원회에 보고해야 해. 진짜. 이따위 상황쯤이야 별로 슬픈 상황이 아니라고 당신이 바락바락 반발을 해도 내 인격이 크게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겠지만서도. 그래도.

 

© 서 량 2009.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