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00. 겹쳐진 날

서 량 2010. 2. 12. 14:00

 올해는 마침 또 구정(舊正)이 발렌타인즈 데이 2 14일과 같은 날이다. 사랑하는 남녀들이 꽃이나 초콜렛을 나누는 양키 풍습과 어르신네들에게 세배를 올리는 우리의 습관이 2010년에는 뒤범벅이 됐다.

 남녀가 결혼을 하면 그들은 하나의 공동체가 되면서 우리말로 부부라 하고 영어로는 'man and wife' 혹은 'husband and wife'라 한다. 그러나 혼전에 서로 좋아하는 사이나 혼외정사 같은 관계라면 꼭 'boyfriend', 'girlfriend'라 호칭한다. 우리는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성급하게 줄여서 남친, 여친이라는 약칭을 쓰는데 사실 이 말은 별 감칠 맛이 안 나는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싱거운 표현이다.

 양키들이 성숙한 어른을 뜻하기 위하여 'man friend', 'woman friend'라 하지 않고 'boy' 'girl'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 대하여 당신은 어딘지 수상하다고 느끼지 않는가. 아직 꼭지에 피도 안 마른 소년 소녀들이 무슨 사랑을 하겠다고 씩씩대는가. 간혹 'male friend' 'female friend'라는 민숭민숭한 말을 듣는 수는 있지만 보이프렌드, 걸프렌드에서 풍기는 섹슈얼한 뉘앙스가 싹 사라지고 만다.

 'friend'는 고대영어로 'freond'라 했는데 사랑하거나 호의를 보인다는 뜻이었다. 독일어에서 보이프렌드에 해당하는 말은 'Freund', 걸프렌드가 'Freundin'이고 둘 다 'friend'와 어원이 같다. 불어로는 프렌드보다 '동반자(companion)'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copain: 남친(꼬빠)', 'copine: 여친(꼬삔)'이 있는데 역시 보이프렌드, 걸프렌드 같은 천진난만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어쩐지 한드 (이것도 성급한 우리들이 한국드라마를 석둑 잘라 쓰는 약자)에서 남친을 '오빠'라고 부른다 했더니 혹시 불어의 '꼬빠'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아닌가 하노라.

 자유롭다는 의미, 혹은 공짜라는 뜻의 'free'도 상기한 고대영어의 'freond'에서 'd'를 뺀 'freon'에서 파생했다. 서로 호의를 품고 좋아하는 사이에서는 속박보다는 자유가 충만하고 애인이나 부부 사이는 모든 것을 무료로 나눠서 공유한다는 뜻도 되겠다.

 

 한자어의 친구(親舊)는 어떤가. '친할 친'자에 '옛 구'자다. 이때 '옛 구'자는 '구식'에서처럼 오래됐다는 의미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에서도 같은 뜻으로 쓰이는 ''자다. 그래서 친구는 오래 사귄 사이가 필수조건이다. 엊그제 인사를 나눈 사람은 아직 친구가 아니다.

 

 정신과에서 환자의 성격을 분석할 때도 그 사람을 아주 오래 동안 상종해야 비로소 친근감을 느끼게 되거나 혹은 거부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상례다. 그래서 남녀가 사랑을 할 때도 되도록이면 오랜 세월을 가깝게 지내봐야 상대의 성격과 품성을 알게 된다는 이론이다. 첫눈에 홀딱 반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미국여자 이름에 'Amy: 에이미'라는 이름이 있는데 우리가 잘못 들으면 '어()'처럼 들리지만 'amiable', 또는 'amicable'과 말 뿌리가 같은 표현으로 'friendly (정다운; 친절한)'하다는 뜻이다.

 

친구와 반대되는 개념은 적()이다. 'enemy' 13세기 경 고대불어 'enemi'에서, 'unfriendly: 비우호적'이라는 말이었고, 친구가 아닌 사람은 곧 적이라는 이분법 사고방식의 소치였다.  

 

 구정(舊正)도 직역하면 '오래된 정월 달'이라는 뜻이 된다. 우리에게 친근감을 주는 설은 역시 음력 설이다. 그 정겹고 오래된 설날이 어쩌다가 올해는 양키 남녀들이 사랑을 나누는 날과 폭삭 포개졌는가.

 

© 서 량 2010.02.14

-- 뉴욕중앙일보 2010년 2월 17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