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97. 호랑이가 어흥, 하면

서 량 2010. 1. 4. 07:24

 경인년을 맞이한다. 호랑이 해. 어흥~ 하는 호랑이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재작년 이맘때쯤이었는지 대학 동기 친구들끼리 연말에 한 번 만나 서로의 생존여부를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 사이에 한 명은 벌써 저 세상으로 간 것으로 슬프게 기억한다. 그런데 오래 만에 보는 한 친구가 ", 량이야, 너는 왜 그렇게 살이 쪘냐?" 하는 것이 첫마디다. 그래서 나도 그 친구에게 "너도 그 사이에 많이 늙었구나. 이제는 얼굴에 여기저기 저승 꽃이 피었네!" 하며 쏘아 부쳤다.

 

 사람이 그런 식으로 본대로 느낀 대로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마음이 옹졸한 나도 똑같은 부류의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랬더니 이 친구는 자기가 먼저 한 불쾌한 말은 새카맣게 잊어 버리고 내가 한 악담이 섭섭해서 더 이상 나와는 상종을 하지 않겠다는 굳은 표정으로 저쪽으로 가 버렸다.

 

 상대가 내게 불쾌한 소리를 했으니 나도 상대에게 불쾌한 발언을 해야 서로간에 네거티브 예절(?)의 밸런스가 맞지 않겠는가. 내 기질상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불쾌한 발언을 고개 푹 숙이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근성이 있어서 미안하다. 이것은 한대 맞으면 한대 때리겠다는 공격성의 소치다. 일종의 깡패기질이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어찌 누구에게든 맞고만 살겠는가.

 

 양키들은 하늘이 두 조각이 나는 한이 있어도 상대방 용모의 약점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좋은 점은 꼭 말한다. 이를테면 'You look very good today: 오늘을 참 좋아 보이십니다' 혹은 'I like your outfit: 옷차림이 마음에 들어요' 하는 식으로 상대의 기분을 북돋아 준다.

 

 'face' 13세기 말에 고대 불어의 'face'와 라틴어의 'facia'에서 '외모; 겉모습; 얼굴'이라는 뜻이었고 17세기에 생긴 말 'factitious: 인위적인' 혹은 'fictitious: 허구의; 허위적인'와 그 말 뿌리가 같다. 그렇다. 겉모습은 허구에 불과하다. 시쳇말에 'Fake it till you make it: 저절로 될 때까지 허위로 조작하라'는 슬로건이 있는데 이것은 억지로라도 웃다 보면 가짜 웃음이 진실로 보인다는 속담이다.  

 

 불어가 영어로 변천한 'vis-a-vis'는 문자 그대로 'face to face'라는 말이고 불어의 'vis'는 얼굴이라는 뜻. 같은 말 뿌리에서 'visage: 얼굴'이라는 고급영어가 14세기에 생겨났다. 시각적이라는 뜻의 'visual'도 얼굴과 말 뿌리가 같다. 시력이나 선견지명이라는 뜻의 'vision' 'vis'에서 파생된 말이다. 사람 얼굴이 왜 있나. 남들이 보라고 있지. 당신이 한국을 방문할 때 인천 공항직원이 미국시민 여권에 도장을 쾅쾅 찍는 것도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 하는 'visa'라 한다.

 

 오래 만에 만나서 반가운 사람들 간에 '왜 그렇게 폭삭 늙었어', '왜 그렇게 살이 쪘어', '왜 그렇게 말랐어'하는 식으로 상대의 약점이나 결점을 지적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자기가 남의 용모에 대하여 약점을 지적하는 발언은 괜찮고 남이 자기의 결점을 언급하면 기분 나빠하는 심보는 또 무슨 심보인가.

 

 비라도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겨울 아침에 직장 상관에게 'Good morning!' 하는 대신에 당신은 본대로 느낀 대로 'Bad morning!' 이라고 인사를 하겠다는, 그런 뻔뻔스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그야말로 호랑이가 물어갈 마음가짐으로. 

 

 

© 서 량 2010.01.03

 

-- 뉴욕중앙일보 2010년 1월 6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