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80. 디오게네스(Diogenes)의 비애

서 량 2009. 5. 12. 11:07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이 그리스 거리에 누워 뒹구는 디오게네스(기원전 412-323)에게 호의를 베풀고자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기가 즐기고 있는 햇볕을 가리지 말고 저리 비켜달라 했다는 일화를 당신은 기억하는가.

 

그 안하무인의 희랍철학자는 견유학파(犬儒學派: the cynics)의 대가다. 'cynic'은 희랍어의 'kynikos'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는데 '개 같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한자로 번역된 '견유학파'에도 '개 견'자가 들어간다. 냉소적으로 남의 결점을 지적하는 일을 낙으로 삼는 디오게네스는 당시 희랍철학자들에게 '개 같은' 취급을 당했다. 동시대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거대한 그림자에 시커멓게 가려져서 독설과 시니컬(cynical)한 발언 말고는 크게 빛을 보지 못한 디오게네스였다.

 

그는 또 대낮에 등불을 들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자기의 기괴한 행동은 '정직한 사람'을 찾아 다니는 행위라고 스스로 발표한 것으로도 소문이 자자했다. 백주의 태양광선만으로 부족해서 등불을 들고 다니던 그의 연극적인 행동이 가소롭고 애처롭다.

 

'candle'은 범어의 'kand'에서  '반짝이다; 환하게 빛나다'라는 뜻이었다. 이미 고대 영어에는 가톨릭의 성촉절(聖燭節) (candlemass: 2월 2일 성모 마리아의 순결을 축하는 촛불 미사)이라는 말이 있었다. 워낙 촛불은 종교적인 행사나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엄숙한 제식으로 양키들의 의식을 파고 들었다. 요새 한국에서처럼 정부를 규탄하는 행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촛불집회의 대상은 늘 미국과 남한 정부이고 근래에 핵실험으로 전세계에 논란의 대상이 된 북한은 결코 아니다.

 

선거입후보자를 뜻하는 말로 'candidate'라는 단어가 1613년부터 쓰였는데 그것은 로마에서 공직에 선출되고 싶은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반짝이는 흰 광목포대 같은 예복(togas)을 몸에 두르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candid'는 숨길 것 하나 없이 밝고 솔직하다는 뜻. 미국의 유명한 티브이 프로그램에 'candid camera (솔직한 카메라)'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 말인데 우리말로는 정 그 반대로 '몰래 카메라'라 한다. 양키들은 카메라가 있는 그대로를 밝히는 솔직성에 착안한 반면에 우리는 카메라가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촬영을 하는 그 음흉성에 더 감동을 받은 모양이다. 이렇게 한미간의 사고방식이 정반대이니 미국은 응당 우리 촛불시위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리라.

 

카라마조프의 형제에서 살부(殺父)의 지적(知的)인 배경을 제공한 둘 째 아들, 무신론자 이반은 이윽고 악마와 토론을 한다. 악마는 신과 함께 균형을 이루는 자신의 필요성에 대해 미묘한 주장을 펼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힘차게 말한다. "인간 마음 밑바닥에는 언제나 선과 악이 함께 물결치고 있다."

 

이것은 신과 악마의 공존임과 동시에 동양의 음양론(陰陽論)에서 음과 양이 상부상조하는 역학(力學)이기도 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반의 입을 빌어 선은 악을 필요로 한다고 역설한다. 당신도 귀를 기울여보라. 광명은 암흑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는 촛불의 잔잔한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인터넷을 쏘다니다가 서울에서 일어나는 촛불시위와 그들을 진압하는 경찰의 강경한 행동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심지어 대낮에도 촛불시위를 한다는 기사까지 보면서 문득 대낮에 등불을 치켜들고 그리스를 방황하던 견유학파의 태두 디오게네스 생각이 났다. 사람들에게서 개 취급을 받던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정녕 그는 번쩍이는 태양의 광휘보다 자기 손에 든 조그만 등불 하나가 진실을 밝힐 것을 소망했단 말인가.
 

© 서 량 2009.05.11

--뉴욕중앙일보 2009년 5월 13일에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