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쉰 살을 넘긴 로이스를 얼마 전에 초진하면서 주증상이 뭐냐고 물어 봤지, 습관적으로. 그랬더니 자기는 정신분열증이라는 거야. 나는 억지로 웃으면서 진단명 같은 것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힘주어 말했어. 당신도 알겠지만 웰빙, 웰빙, 하는 요새 사람들은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병명 혹은 진단명이야. 누가 기침을 하면 폐렴이라고 얼른 진단명을 붙여주는 세상이니까. 독감인지 감기몸살인지 너무 담배를 많이 피워서 생긴 기관지염인지 하는 그런 감별진단 따위는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요새는 기침 이콜(equal) 폐렴이라니까. 그러면서 무조건 항생제를 때려 넣는 의사들이 한둘이 아니야, 바쁜 세상에. 진짜.
다시 꼬치꼬치 물었더니 자기가 눈을 옆으로 돌릴 때마다 공중에 무슨 물체가 보인다는 거야. 미역처럼 흐늘거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거미가 기어가는 것 같대. 눈을 옆으로 돌려서 미역이나 거미 같은 형체가 보이면 그게 정신분열증이라고 누가 그러든? 하고 따지고 들었어. 나 따지기 시작하면 인정 사정 없는 거 당신 혹시 아나 몰라. 어떤 동네 내과의사가 그건 정신분열증 증세라고 했다나, 어쨌다나. 참, 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그건 소위 안과의사들이 별거 아니라고 걱정하지 말라는, 소위 floater, 부유물이라는 것인데 사람이 나이 먹으면서 별 이유 없이 각막 속 조직이 좀 부스러져서 둥둥 떠다니는 죽은 세포로서 신경에 좀 거슬리는 것 말고는 별 의미가 없으니까 누구나 그런 현상에 익숙해지는 법이라고 설명했더니 반신반의하는 눈치더라구. 그래서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더니 나중에는 믿더라니까.
그녀는 21살 때 무슨 열병을 앓고 난 후부터 자기가 살인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갖가지 방법으로 살인을 하는 꿈을 자주 꿨고, 칼리포니아의 연쇄살인자 찰스 메이슨(Charles Mason)이 꿈에 나타나서 자기와 손잡고 사람들을 죽이자고 꼬시고 그랬다는 거야.
비구니처럼 머리를 박박 면도로 깨끗하게 밀고 화장도 전혀 안했기 때문에 양키여자 치고 좀 기괴해 보이는 것 말고는 얼굴이 갸름하고 눈매 곱상한 이태리계 여자야, 로이스는. 어디를 봐도 살인의 동기의식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여자야. 전혀. 내 말을 믿어 줘.
로이스는 뉴욕의 명문대학 콜럼비아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딴 나나 당신이나 별 다름 없는 지성인이야. 오히려 더 머리가 좋을지 몰라요. 걔는 수년 전에 맨해튼 어느 조그만 출판사를 통해 엽기적인 탐정소설을 써서 웬만큼 알려진 그야말로 애숭이 중견작가인데 그런대로 돈도 좀 벌고 요새는 대망의 두 번째 소설을 쓰고 있는 중이래. 나도 걔 첫 소설을 읽었지, 호기심에서. 두 번째 소설은 아직 제목을 결정하지 않았지만 한 3,4년 후에 완성될 때쯤 책 제목을 결정하겠다나. 평생을 독신으로 살인을 꿈꾸며 살아온 빡빡머리 로이스.
요새 쓰는 소설 내용이 뭐냐구? 응, 물론 연쇄살인자를 주인공으로 한 거지. 살인자는 두 말할 나위 없이 못생긴 남자. 그런데 그 살인자를 끈덕지게 취재하러 쫓아다니는 신문사 여기자가 있대나 봐. 여우 같은 여자래. 그래서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냐구? 그걸 물어볼까 말까 하다가 안 물어 보기로 했거든. 왜냐하면 그들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싸우면서 서로 이를 득득 가는 사이래. 그리고 작가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저는 살인자도 여기자도 둘 다 아주 자기 마음에 안 든다는 거라나? 이걸 어쩌면 좋으니.
그 여자가 오늘 아침 첫 환자였어. 마약은 절대 아니면서 약리작용을 당신에게 설명하기가 힘이 드는 좀 이상한 약을 처방하고 있는데 이 여자 왈, 얼마전부터 자기는 살인자라기보다는 작가라는 거라. 그래서 나도 얼른 그렇다고 동의했다. 어때, 잘했지?
© 서 량 200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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