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얘기

|환자얘기| 다섯 살짜리 딸

서 량 2009. 2. 28. 08:35

올해 쉰 살인 리차드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 온 이유가 뭔지 알아? 당신이 얼른 믿지 못하겠지만 저보다 세 살 아래인 와이프가 올해 다섯 살짜리 딸 기저귀를 꼭 리차드에게 갈아달라고 강요하기 때문에 괴롭고 살 맛이 안 났다는 게 불행의 씨앗이었어. 마침 또 딸도 애비가 기저귀를 갈아 주는 걸 치를 떨면서 싫어한다는데. 이게 무슨 변고인지.

 

나는 나대로 그 말이 믿어지지가 않는 거야. 첫 째, 어떻게 다섯 살 짜리가 아직도 기저귀를 차느냐 하는 의문이 생겼지. 아니야. 얘가 똥오줌을 가리지 못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야뇨증과 뇨실금증이 있다는 거라. 아무 때나 오줌을 싼대. 특히 밤에 잘 때 오줌을 싸기 때문에 아침이면 기저귀를 갈아야 한대. 둘 째, 애 엄마는 어디 손목이 불어졌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랬더니 리차드 와이프는 심한 우울증이 있는데 항우울제를 먹는데도 만사가 귀찮고 남편 밥도 안해 주고 애도 안 돌보고 모든 집안 살림을 리차드가 한대나 봐. 저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케이블 티브이만 보고 밤낮으로 아이스크림 먹고 피자 먹고 해서 몸이 근 400 파운드래. 코메디 채널을 보면서 깔깔 웃다가도 리차드만 방에 들어 오면 똥 씹은 얼굴로 인상을 빡빡 쓴대. 부부는 근 3년을 섹스를 안 했대. 리차드가 하자 해도 지랄발광을 하면서 거절한다는 거라.

 

리차드는 아주 착실한 자동차 정비공인데 매일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을 하고 집에 와서 집안 청소하고 와이프 저녁 해 먹이고 애 돌보고 하느랴 지 정신이 아니래. 다 좋은데 아침에 눈 뜨자 마자 다섯 살짜리 딸년 기저귀 벗기는 건 죽기보다 싫다는 거야. 그래서 하루는 일부러 그걸 하지 않았대. 그랬더니 와이프가 '당신 같은 불성실한 남편이 싫다' 라는 쪽지를 써 놓고 집을 나갔다는 거라.

 

사방팔방 수소문을 해 봐도 와이프의 거처를 알 수가 없대. 친정에도 안 가고 웬만한 친구집에 전화를 걸어 봐도 도저이 찾을 수가 없다는 거라. 경찰서며 에프비아이에 와이프 실종신고를 하고 직장도 등한시했더니 덜커덕 해고 당하고 그 동안 푼푼이 저축해 둔 돈을 야금야금 까먹으면서 다서 살 짜리 딸하고 둘이 사는 거라. 아침마다 퀴퀴한 기저귀를 벗기고 갈아 주며.

 

이걸 어쩌나 싶다가 나는 진정제를 처방하면서 '당신이 이 약을 먹는다 해서 절대로 와이프가 돌아오라는 법은 없으니 그리 알아라' 하고, 단지 '당신의 극도로 예민한 정신상태가 좀 둔해지면 심리적인 아픔이 경감될 것이라'고 위로해 줬지. 그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였어. 그랬더니 리차드 왈,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몸에 힘이 난다는 거라. 그래서 나도 덩달아 당신이 힘이 난다니까 나도 힘이 난다 했더니 울상을 지으면서 킬킬대면서 웃더라구. 이 얘기를 듣고 있는 당신도 그러리라 느껴지지만, 나 리차드가 불쌍해 죽겠어. 허우대는 삶은 감자처럼 멀쩡하게 생긴 놈이 말이지. 살결은 배추 속살같이 허옇고.

 

© 2009.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