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된 詩

|詩| 바닷가 피자집

서 량 2009. 2. 4. 14:53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한 30분 거리
웨스트체스터 카운티 정신건강협회
창립 50주년 기념식을 아침에 마치기가 무섭게
어제 밤 용수철 하나 철컥 불어진 클라리넷을
고치려고 오후 환자 약속을 모조리 취소시켰다
자주 가는 화이트플레인즈 샘애쉬(Sam Ash) 악기점은
수선공이 일주일 휴가라 내주 월요일에 다시 오란다

 

 화이트플레인즈 남동쪽 8마일 떨어진 마마로넥은 짭짤한 해변도시. 금관악기와 목관악기만 취급하는 악기점을 급하게 전화 걸어 찾아간다. 나이 깨나 먹은 프로페셔널 딴따라, 승질 더러운 관악기 주자들이 자주 드나드는 그곳은 웬만한 수리는 즉석에서 해 준단다. 나는 삐거덕 문을 디밀고 들어가 징기스칸 인상을 쓰면서 묻는다. 이 악기를 고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문제 없어요. 늦어도 20분이면 됩니다.

 

악기점에 악기를 맡겨 놓고
햇살이 거울처럼 번득이는 바다쪽으로 걸어간다
자동차부속품점이며 몇몇 골동품가게와 이름도 이상한

무슨 생명보험회사를 지나니 피자집 하나 보인다

 

 소시지를 얹은 피자. 반듯한 이등변삼각형을 먹는다. 내 정신적 밸런스는 이등변삼각형에 토대를 둔다. 저쪽 테이블에서 종달새마냥 쩍쩍 입을 벌리며 이등변삼각형을 먹는 양키들. 나나 니들이나 벌건 대낮 바닷바람에 취해 놀기는 마찬가지 아니냐.

 

악기가 잘 고쳐졌나요 오우 예 이젠
정말 새 악기나 다름없어요 앞으로도
한 30년은 좋은 소리가 날 것입니다
한번 테스트해 볼까요

삐리리리 삐리 삐리 삑삑 삐이 삐이
나는 피자냄새 이태리 숨길을
클라리넷에 직통으로 집어넣으며
평소 좋아하는 어려운 멜로디 몇 개를
테크닉을 과시하며 여기저기 틀리게 연주한다

 

 나 미국에서 늘 이렇게 오바하면서 살았다. 부끄럽다. 내 생명, 내 숨길, 내 잠꼬대 같은 클라리넷 소리가 바닷바람에 흩어지며 사라지던 6월 하순, 그 환한 오후가 잊혀지지 않는다.

 

© 서 량 2000.06.25

-- 두 번째 시집 <브롱스 파크웨이의 운동화>(문학사상사, 2003)에서

시집 소개: http://www.munsa.co.kr/GoodsDetail.asp?GoodsID=670

2009.02.0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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