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얘기

|환자얘기| 나를 골탕 먹인 환자

서 량 2008. 10. 21. 08:35

 30여년 전에 뉴욕 코넬의대에 운 좋게 정신과 수련의로 발탁이 돼서 한 6개월이 지난 다음 정신병동에서 입원환자를 상대할 때였는데 마침 내게 배당된 환자가 린다라는 여고생이었어. 미국 온지 얼마 안된 철부지 나이에 그때는 웬만한 양키여자들은 어른이건 애건 왜 그렇게 머쓱한 기분이었는지 나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그렇게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라면 또 말도 안해. 그래도 명색이 뺀드부 출신, 막무가내로 용감무쌍한 딴따라 기질이 있잖아 내가.

 

 그 여고생의 증상이 뭐였냐구? 쉽게 말해서 망상증이였어. 걔는 지가 그 당시 몇 년 전에 히트친 영화 <러브 스토리>에서 주인공 역활을 맡은 '앨리 맥그로우'라는 거야. 당신도 생각 나? 얼굴에 죽은깨가 많이 있고 새하얀 함박눈 위에서 하바드 대학생으로 나온 라이언 오닐하고 같이 딩굴고 야단법석을 치다가 백혈병으로 요절한 여자 말이지. 글쎄 지가 그 영화 주인공이라는 거라. 영화 속에서 앨리 맥그로가 '제니퍼'라는 이름으로 나오잖아. 지가 그 영화 속의 제니퍼라는 거라.

 

 그때 내가 뭘 알아. 그저 환자 주치의가 가르쳐주는 대로 하는 거지. 그래서 주치의가 시키는 대로 잘 하면 수련의로서 점수가 높게 나오는 거라. 나야 물론 앞 뒤가 꼭 막힌 모범생 기질이 좀 있잖아. 뺀드부도 뺀드부지만. 흐흐흐. 주치의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였다구 그때.

 

 주치의 왈, 린다가 하는 말을 다 귀담아 들어라, 그리고 절대로 린다가 주장하는 망상에 대해서 의심을 품거나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맞장구도 치고 그래라, 하는 거야. 내 정말 당신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미친 사람이 하는 말에 맞장구치는 거라는 거 알아? 응, 몰라도 되지만 말이지. 그래서 일주일에 세 번씩 린다 얘기를 한 시간씩 들으면서 "응, 그랬구나," 라던가 "올리버(라이언 오닐)가 그런 말을 했을 때 기분이 어땠니?" 하고 물어보고 부추겨주고 그랬지.

 

 근데 난처한 상황이 벌어졌어. 린다는 어느날 제니퍼가 죽는 장면을 얘기하면서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거야. 참 딱하대. 자기가 그 영화에서 죽을 때 그렇게 슬펐다는 거라. 아, 말이야 백 번 맞는 말이지 지가 죽는 장면에서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다 좋은데 그때 나도 모르게 실언을 한 거야. 정신과 수련의 일년차 왈, "니가 제니퍼라면 그 영화에서 죽고 없어졌는데 너는 지금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 이거 어떻게 된 거야?" 했지.

 

 그랬더니 글쎄 린다가 갑자기 눈물을 싹 멈추고 뭐라는지 알아? "아무리 아무 것도 모르는 정신과 수련의지만 이거 정말 너무해. 영화는 영화고 나는 나라는 몰라? 뭐 이래. 그럼 당신은 정말로 내가 <러브 스토리>의 제니퍼였다는 걸 믿었다는 얘기야?" 하는 거라. 나 참 기가 막혀서. 난 주치의가 시키는대로 했을 뿐인데.

 

 다음날 그 얘기를 주치의한테 했다. 얼굴까지 붉히면서. 그랬더니 주치의 왈, "오, 닥터 서.. 당신이 내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린다 말을 들어줬기 때문에 린다가 제 정신이 들은 겁니다. 당신은 참 훌륭한 정신과의사가 될 자질이 있어요." 하는 거라.

 

 그 순간 나 정신이 얼떨떨했다. 린다도 미쳤고 주치의도 미쳤고 나도 미쳤고 다 미쳤다는 생각을 한 거야.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얼떨떨해지냐구? 흐흐흐. 아니야. 지금은 그때 생각을 하면 그렇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는 거야. 당신 내 마음 이해할 수 있어? 허기사 못해도 괜찮지만.. 킥킥.

 

© 서 량 2008.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