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얘기

|환자얘기| 캐시와 브루스

서 량 2008. 9. 5. 07:58

 나이 53살인 브루스(Bruce)는 허우대가 배추 속살처럼 허연 아이리시(Irish)계 잘생긴 남자인데 얼른 보면 40대 초반으로 뵈는 늘씬한 사내야. 20년 동안을 기상관측대에서 일을 하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천직을 때려치우고 그 동안 쏠쏠히 모아 놓았던 돈을 꾸려서 뉴욕시 북부 소도시에 나이트 클럽 겸 술집을 차린지 2년이 됐대. 이혼한지 3년 만에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어서 그랬다나, 뭐 그래 하여간. 어때, 당신이 듣기에 시작이 좀 그럴듯하지 않아? 영업시간이 저녁 8시부터 새벽 4시까지라나. 새벽 4시까지 술을 처먹는 인간들이 있는 모양이지. 그러니까 그때까지 하지. 장사도 아주 잘 한다는 거야.

 

 지난 1월 말에 19살 짜리 여대생이 혼자 그 술집에 들어와서 섹시하게 폼을 잡으면서 술을 마시다가 브루스가 그 술집 대빵으로 설치면서 다니니까 걔한테 아양을 떨고 추파를 던지고 하다가 그날 밤 둘이서 통정을 했대. 브루스는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황홀한 정사는 처음이었대. 그리고 1 주일 후부터 이 년놈들은 동거를 시작하고 여대생 캐시(Cathy)는 매일 브루스와 같이 동거동락 하면서 명실공히 걔 여편네 행세를 했다는 거라. 23살 난 브루스 딸이 틈만 나면 애비한테 용돈 좀 달라고 오는 상황에서 말이지

 

 물론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렀지. 남자건 여자건 들뜨고 행복할 때는 시간이 무지기 빨리 가는 거 있지. 모르긴 몰라도 아마 당신도 혹시 겪어봤으면 알걸. 근데 둘이서 알콩달콩 사랑에 빠진지 꼭 한 달이 지나서 캐시 전 보이 프렌드한테서 핸드폰으로 캐시한테 전화가 왔대나, 뭐 하여간 그랬대. 그랬더니 캐시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쌍소리도 하고 엉엉 울고 그랬다는 거야. 당신은 어때. 나는 요새 이런 비슷한 장면을 한드(한국 드라마의 약자)에서 자주 보는데. 하여튼 간에 한국인이건 양키건 남녀간에 뭐가 수틀리면 목소리 큰 쪽이 이기는 거 같아. 앞뒤 관계라든가 지성적인 판단이건 나발이건 별로 안 중요해.

 

 그 다음날 짜릿한 섹스 후에 브루스가 코를 천장이 무너져라 드렁드렁 골면서 자는 사이에 캐시가 대충 짐을 싸고 떠났다는 거야. 장문의 편지를 남겨 놓고 말이지. 그러면서 브루스는 나한테 캐시가 쓴 그 편지를 보여주는 거야. 이 놈이 나를 찾아 온 이유는 자기의 분노와 불면증을 고쳐달라는 게 아니고, 캐시가 남긴 편지를 분석해 달라는 것이 주목적이었어. 나 참 기가 막혀서.

 

 내가 말하기를 "당신이 지금은 내 환자의 역할을 하는 입장이니까 당신의 감정에 귀를 기울이고 당신의 정신상태를 분석할 수는 있어도 캐시의 정신상태를 감정하는 거는 아마도 무척 힘이 들거나 불가능할 것입니다" 했지. 되도록 동양적이면서도 떨떠름하게 똥 씹은 표정으로 말이지. 그랬더니 브루스 왈. 어쨌던 그 편지를 내 책상 위에 놓고 갈 것이니 내가 그걸 읽고 연구하는 시간에 대한 수수료는 따로 낼 테니까 잘 부탁한다며 그 배추 속살처럼 잘 생긴 얼굴을 울먹울먹하면서 일주일 후에 다시 보기로 하고 세션(session)을 마친 거야. 아까 오늘 오후에.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환자들 앞에서는 되도록 근엄한 척하지만 나도 사람 아니니? 그래서 그놈이 나가고 난 다음에 4페이지에 해당하는 캐시의 육필을 대따로 탐독한 거 있지. 일단 얘기는 여기서 끝이 나야 할 것 같아. 지금 당신 표정이 눈에 선하네. 캐시가 부르스한테 뭐라고 편지를 썼는지 솔직히 궁금해 죽겠지?

 

© 서 량 2008.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