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얘기

|환자얘기| 신경성 대장염

서 량 2008. 9. 27. 07:24

당신이 어찌 들으면 좀 재미가 날지, 아니면 다소 지루한 얘기를 하나 해 줄까.

한 달쯤 전에 40대 중반의 백인 환자를 봤는데 척 보기에 야, 저렇게 머리 좋고

똑똑해 뵈는 사람도 세상에 있구나 할 정도로 야무진 얼굴에 눈이 초롱초롱하고

조근조근 재빨리 요점과 급소를 콕콕 찌르는 말만 하는 사람이더라구.

약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로 그 나이에 아직 미혼 총각이래. 하여간

문제가 뭐냐고 물어 봤더니 자기가 돈이 없어 아파트 렌트비를 못 내는 관계로

내일 모래 쫓겨나게 생겼는데 영세민이 되는 방법을 몰라서 내게 왔다는 거야.

 

내가 대뜸 말하기를 나는 정신과의사일 뿐 사회복지국에

영세민으로 접수하는 방법은 전혀 모른다고 그건 도와 줄 수 없지만 어쩌다가

그런 지경이 됐는지 궁금하다고 능청을 떨었지. 워낙 고지식하지만 직업적인

능청은 가끔 잘 떨거든 내가. 배운게 도둑질이라더니. 킥킥.

 

이 똑똑하기 짝이 없는 놈은 가까운 동네 원자력발전소에서 일을 하는 놈이야.

어쩐지 눈이 초롱초롱하다고 했잖아. 그것도 좀 높은 자리에 있었는데

해고를 당했다는 거라. 이거 좀 기가 막히지 않아, 응? 당신은 별로 기가 막히지

않더라도 일단 내가 애써 말하는 성의를 봐서라도 그렇다고 해 줘요.

해고를 당한 이유인즉 다음과 같아.

 

걔는 신경성 대장염이 있어서 하루에도 심하면 대 여섯 번씩 화장실에

큰일을 보러 간다는 거라. 마음이 편한 날이라야 한 두 번이래.

근데 무슨 중요한 프로젝트가 떨어지면 그 다급한 여행의 빈도 수가 올라간대.

화장실이 자기 사무실에서 걸어서 좀 시간이 걸린다나 어떻다나. 근데

일급 통제 구역을 쓱 지나가면 금방이라서 너무 급할 때는 그 통제구역을

가로질러 얼른 화장실로 뛰어간다 이거야. 미안해. 자꾸 화장실 얘기를 해서.

 

그러다가 한 번 구내 순찰원한테 들켜서 상부에 보고가 들어갔다는 거야.

원자력에 대한 일급 비밀이 비장돼 있는 통제구역을 이놈이 살금살금 지나갔다는 거라.

누가 알아. 하다 못해 쏘련에서 비밀리에 돈을 받는 스파이 짓을 하는 의심을 받았는지.

 

다시는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는 경고를 받은 그 다음 날 통제구역을 가로 질러

급하게 화장실로 가다가 또 걸린 거야. 그래서 해고를 당한 게 6개월 전이야.

그 다음부터는 생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두문불출한 채 하루에 서너 번 큰일을 보면서

월급도 끊어지고 해서 렌트비도 못내고 하다가 아파트 주인에게서 퇴거명령을 받았다는 거.

 

명색이 이 놈이 공학박사야. 근데 어렷을 때부터 불안하면 아무 때나 설사가

나온다는 거야. 당신한테 대따로 미안하다. 설사라는 단어를 되도록 안 쓸려고 했는데

기어이 그 말을 썼네. 내과의사한테 가도 대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서

강력한 약을 이것 저것 복용해도 아무런 효혐이 없대. 이걸 어쩌면 좋으니.

 

머리만 좋아서 박사가 되면 뭘해. 사람이 똥 오줌을 잘 가려야지. 더구나 어른이.

나 요새 고민 중이야. 이 똑똑한 놈을 어떻게 도와 줘야 좋을지 모르겠다.

 

© 서 량 2008.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