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64. 굵고 짧거나, 가늘고 길게

서 량 2008. 10. 13. 08:44

 1900년부터 쓰인 'top dog'라는 슬랭을 '꼭대기 개'라고 직역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도대체 뭐라 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하다가 결국 '대빵'이라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빵은 네이버 국어사전에 '가장 큰 것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라 나와있지만 누구나 알아듣는 우리말 속어다.

 

 'top'은 사람 머리의 머리칼이 다발(tuft) 모양이라는 데서 꼭대기라는 뜻이 됐다. 그러니까 'top'은 'tuft'에서 유래된 단어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 자칫하면 날아가기 쉬운 '부분가발'을 'toupee'라 하는데 역시 'tuft'를 뜻하는 고대불어에서 나온 말이다. 보스턴의 'Tufts University'도 자기네들이 최고라는 암시를 주는 대학 이름이다.

 

 대빵의 '대'는 아무래도 '큰 대(大)'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자는 사람(人)이 팔을 양 옆으로 들고 서있는 모양의 상형문자다. 사람이 일어서서 팔을 벌리면 그게 바로 크다는 뜻이 된다. 큰 대자에는 또 훌륭하고 뛰어나다는 뜻도 있다. 당신도 얼른 동의하겠지만 큰 것은 훌륭한 것이다. 조약돌도 좋지만 '큰 바위 얼굴'이 더 웅장하지 않은가.

 

 양키들도 큰 것을 좋아한다. 'big'은 1300년경에 영국에서 탄생한 말로 본래 물체의 크기와는 상관 없이 'strong' 혹은 'powerful'이라는 뜻이었다. 사이즈가 크다는 뜻으로 처음 쓰인 것은 1386년이었고 중요하다는 의미가 첨가된 것이 16세기 후반이었다. 강한 것은 큰 것이요 큰 것은 중요한 것이다.

 

 'big'은 크다는 의미에서 나중에 지위가 높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변했는데 이를 테면 옛날 영국 판사들이 커다란 가발을 쓰고 법정에 나오던 습관 때문에 'big wig'은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big fish (대어: 大魚)', 'big cheese'도 'big shot'도 죄다 같은 의미다. 옛날에는 혹시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 몸집도 크고 뚱뚱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부유한 그들은 필시 잘 먹고 많이 먹었을 테니까.

 

 'big time'은 요새 우리말 유행어로 '대박'에 해당한다. 근래에 'big deal (대단한 일)'은 그냥 '빅딜'이라 우리말로 옮긴다. 남북한을 합쳐서 플로리다(Florida)주 크기인 우리나라의 국명도 그냥 '한민국'이 아니라 엄연히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뉴욕을 'Big Apple'이라 하고 1949년에 미국의 미래를 예견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에서 'big brother'는 자비와 압제를 동시에 구사하는 미국정부를 뜻한다. 맥도날드의 패스트푸드 중 인기만점인 햄버거를 'Big Mac'이라 부른다. 큰 것은 늘 화려함과 압박감과 대식(大食)을 연상시킨다.

 

 이렇듯 양키들이 부피에 신경을 쓰는 반면에 우리는 길이에 눈독을 들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두머리를 뜻하는 사장이나 회장이나 내무부장관 외무부장관 할 때의 '장'자는 '길 장(長)'자다. 이 글자는 머리칼과 수염이 긴 노인네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모습이라고 한자사전은 풀이하는데 마치도 해리 포터(Harry Potter)에 나오는 노익장을 과시하는 고참 요술쟁이를 방불케 하는 상형문자다.

 

 높은 것과 큰 것을 좋아하는 경향은 우리나 양키나 똑같다. 그러나 유독 긴 것을 추종하는 우리의 의식구조는 어디에서 왔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키가 큰 장신(長身)을 선호했다는 뜻일까. 진시황제의 소원이었던 불로초를 캐어 먹고 수명장수를 하고 싶은 중국적인 욕심의 반영이었을까. 과연 고대의 양키들은 짧고 굵은 인생을 원했으며 우리는 가늘고 긴 수명을 면면히 소망했던가.

 

© 서 량 2008.09.28
--뉴욕중앙일보 2008년 10월 2일에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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