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영어로는 'running water(달리는 물)'이라 하고 우리는 '흐르는 물'이라 일컫는다. 콧물이 흐르는 것도 영어로 'runny nose(달리는 코?)'라 한다. 이렇듯 서구적인 'run'은 급하고 적극적임에 반하여 동양적인 '흐르다'는 여유만만하고 느릿느릿하게 중력의 힘을 빌려 움직이는 소극적인 분위기다. 이것은 독립성이 미흡한 존재의식이기도 하다.
양키들의 시간관념은 대체로 절박감에 허덕이는 것으로 보인다. 'We have run out of time'을 '우리가 시간 밖으로 뛰어 갔다'고 했다가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반면에 '시간이 다 지났다'는 식으로 유유자적하게 번역하면 당신 귀에 금방 쏙 들어올 것이다. 그러니까 양키들의 시간은 아주 다급하게 뛰어가고 우리의 시간은 폼을 재면서 여유작작하게 스쳐가는 셈이다.
생각이 팔딱팔딱 뛰어야 된다는 견해에서 사태의 개요나 요점을 'rundown(뛰어 내려가기)'이라 한다. [예: Here is a brief rundown on what happened: 사태를 간략하게 요점만 말씀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하다못해 TV프로 재방영하는 것도 're-run(다시 뛰기)'라 하지 않던가 말이다.
'give someone the run-around'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어떤 사람에게서 발뺌을 한다는 뜻으로 마치도 관공서 직원이 상대를 골탕 먹이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당신도 겪어 봐서 잘 알겠지만 물론 이런 경우에는 아쉬운 사람이 뛰어 다니기 마련이다. [예: Don't give me the run-around: 이리 저리 발뺌하지 말아요.]
다른 사람 안으로 뛰어 들면 불상사가 일어난다. 그래서 남과 다투거나 승강이가 붙는 것을 'run-in'이라 한다. [예: I had a couple of run-ins with him: 그놈하고 한두 번 다퉜지.] 반면에 'run into someone’ 하면 누구와 우연히 마주친다는 뜻. [예: I ran into her the other day on the street: 요 며칠 전에 길거리에서 그녀와 마주쳤어.] 그리고 'You're in the running' 하면 당신이 뛰고 있다는 뜻이 아니고 '성공할 승산이 있다'는 고무적인 말이다. 이렇듯 'run'은 무진장 동적(動的)인 단어다.
우리말의 '달리다'는 영어처럼 그렇게 경거망동하며 숨넘어가는 개념이 아니다. 사전을 들춰 보니, 1. 달음질 쳐 빨리 가다; 2. 열매 같은 것이 붙어 있다 [예: 사과가 달리다]; 3. 속해 있다 [예: 처자식이 달린 혹은 딸린 몸]; 4. 일손이나 돈이나 힘이 달리다’에서처럼 모자란다는 뜻, 등등으로 나와 있다. 물론 '딸리다'는 '달리다'의 강조형이다.
'달리다'와 동계어로 추산되는 '달이다'를 추적해 보자. '달이다'는 장을 달이고 한약을 달이는 것처럼 무엇이 진하게 되게끔 뜨겁게 끓인다는 뜻. 그래서 안달이 나고 몸이나 마음이 뜨거워지는 상황도 '달아오르다'고 한다.
이상의 유추를 총괄해서 논리의 비약을 거듭하다가 다음과 같은 예문을 만들어 보았다.
사내의 상징이 덜렁덜렁 달려있고 처자식이 주렁주렁 딸려있고 남편을 따라 가야한다 해서 '딸'이라 불리는 딸년 시집보내랴, 돈도 근력도 다 딸리기 때문에 마음이 탕약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고, 그래서 열심히 달음박질을 치다 보면 모든 삶의 근심 걱정이 다 달아난다는 사연.
당신은 어떤가, 얘기가 우습게 빠져버린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run'에 대하여 연구를 하려다가 '달리다'에 대하여 갈팡질팡 이상한 논설로 끝나는 이 이중 언어구조에 대한 호기심이 살살 달아오르지 않는가.
© 서 량 2008.05.25
--뉴욕중앙일보 2008년 5월 28일에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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