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이가 갓난아기 때 기저귀에 달콤한 똥을 싸던 시절에 양지 바른 앞마당 강아지 새끼처럼 방바닥을 기어 다니다가 뭐든 손에 닿기만 하면 대뜸 입으로 가져 가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쇼팽 피아노곡 강아지 왈츠를 근사하게 탄주하는 누이동생 정선이 손가락 신경조직이 전혀 미개발 상태 때 걔가 엄지와 검지만 사용하는 세련된 동작을 못하고 무엇이건 일단 손바닥으로 머리 나쁜 사람 따귀 때리듯 철석 때린 다음 손아귀를 얼추 오므려 물체를 움켜쥐고 진작부터 입을 크게 벌리던 시기
오늘 영어를 하다가 갑자기 무슨 말이 안 나오니까 나도 정선이처럼 미리 입을 크게 벌리더라 히히 말간 뭇국에서 건진 네모 반듯한 무 쪼가리를 어머니가 냄비 뚜껑을 뒤집어 놓고 그 위에 몇 개 얹어 두면 그걸 정선이가 손바닥으로 움켜쥘 때마다 기우뚱 돌아가던 그 양은냄비 소리가 덜그럭덜그럭 들렸다 나와 다섯 살 터울 정선이가 배밀이하면서 멸치국물 흥건히 밴 무 쪼가리를 간신이 입에 넣는 소리가 들렸다 말을 한다는 게 뭘 먹는 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내 영어가 엉망진창이 되더라
© 서 량 2006.05.29
-- 세 번째 시집 <푸른 절벽>(도서출판 황금알, 200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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