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46. 왕과 나

서 량 2008. 5. 14. 10:33

 년 전에 한국에서 <왕의 남자>라는 영화가 히트를 치더니 요사이는 티비 연속 드라마 <왕과 나>가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때 ‘왕’은 임금님을 뜻하지만 우리 속어에서는 크기가 크거나 정도가 대단한 상황을 지칭하기도 한다. 왕만두, 왕거미, 왕소름, 왕짜증, 왕겨, 왕따 같은 말들이 그 좋은 예다. 육이오 사변 때 미군들이 만들어 낸 슬랭 ‘honcho(우두머리)’는 우리말의 ‘왕초’를 양키식 발음으로 한데서 왔다 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왕초는 똘마니의 반대말.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왕(王)을 하늘과 땅과 사람을 아래 위로 관통하는 존재라고 추상적인 해석을 내렸다. 그러나 왕이 원래 도끼의 형상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왕(王)이라는 상형문자를 찬찬히 살펴보면 정말 도끼처럼 보이는 것을.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걸쳐 절대적 권력자는 도끼를 휘두르는 용력과 난폭성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약육강식의 동물세계를 다스리는 방법은 무력을 행사하는 수 밖에 없었고 그 당시 무력의 유일한 도구는 도끼였다. 서부영화에서 인디언들이 왁자지껄하게 카우보이를 습격할 때 말을 타고 휘두르던 바로 그 도끼.

 

 ‘king’은 고대영어의 ‘kin (가족)’과 말의 뿌리를 같이하면서 ‘우두머리’라는 뜻이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의 왕은 살벌한 도끼의 상징이었지만 양키들의 왕은 가족의 우두머리라는 인간적인 면목을 대변한 것이다.

 

 군대에서 실전을 지도하는 장교를 ‘captain(대위)’라 하는데 이 또한 ‘머리’라는 14세기 고대불어 ‘capitaine’과 라틴어 ‘caput’에서 유래한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수도(首都)를 ‘capital’이라 하고 교수형(絞首刑)을 ‘capital punishment’라 하지 않았던가.

 

 킹이나 캡틴이거나 다 우리말의 당수(黨首)에 해당되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능력은 두뇌를 활용하는데 있었다. 힘도 힘이겠지만 힘보다는 지혜가 월등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체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역시 머리라고 보아야겠다. 의학적으로 말해서 고위중추가 뇌 속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적인 개념에서 머리가 좋다는 말은 중추신경계의 첨단을 달리는 대뇌피질의 기능이 왕성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동물적인 생명력을 주관하는 중뇌(中腦) 또한 주먹만한 크기의 뇌 속에 피둥피둥 살아있는 것을 어찌하랴. 우리의 원기 왕성한 중뇌가 식욕이나 성욕 같은 동물적 생명력을 바로 이 순간에도 맡아 주관하고 있다.
  
 1910년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왕권은 이조의 멸망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대통령 제도의 민주주의가 생겨난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우리나라의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하지 않고 대한민국이라 한 것도 제국주의가 민주주의로 진화하는 의미심장한 탈바꿈이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 했듯이 정치체제 또한 최첨단의 영역으로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설파한 것처럼 이제 우리의 왕은 죽고 없다. 그 후 연이어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다. 빽(background)의 시대가 거(去)하고 실력의 시대가 내(來)했도다.

 

 왕권제도라는 개념을 초월해서 ‘대통령(president)’이라는 민주주의적 호칭이 생긴 것은 1787년 미국에서였다. 이보다 앞서서 ‘president’는 은행장이라는 뜻으로 1781년에 처음 쓰였다 하니 대통령은 전국가를 대표하는 은행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경제유통을 꿈꾸는 이명박씨가 대통령으로 뽑혔고 지금 미국에서도 11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박차가 가해지고 있다. 도끼를 휘두르는 왕초보다 백성의 안녕복지를 도모하는 지혜로운 은행장들이 한국과 미국을 부디 지배하기를 바라는 마음 한결같다.


© 서 량 2008.01.21
--뉴욕중앙일보 2008년 1월 23일에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