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45. 야구공과 불알의 차이

서 량 2008. 5. 2. 21:16

 영어 숙어에 야구선수가 공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on the ball'이라는 말이 있다. 정신이 초롱초롱하다는 뜻이다.

 

 미국에 처음 와 뉴저지에서 수련의를 할 때 어느 여자환자가 정신이 멀쩡하다는 뜻으로 'She is on the ball'이라고 하는 대신에 'She is on the balls'라 했다가 회진 도중에 병실이 웃음바다가 된 적이 있었다. 'balls'는 속어로 불알이라는 의미였으니 그 여자환자가 남자 아랫도리를 올라탔다는 말이 된 것이다.

 

 양키들이 불알을 ‘balls’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경이었다. 해부학적으로 고환은 둘이기 때문에 꼭 복수로 쓴다. 'ball'은 원래 둥근 물체를 뜻했다. 'balloon(풍선)'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고 17세기 중엽에는 불어와 라틴어와 희랍어로 'ball'은 춤을 춘다는 의미가 됐다. 그래서 'ballroom'은 '공놀이 방'이 아니라 '무도회장'이라는 뜻. 'ballet(발레)' 또한 같은 어원이다. 중세기의 귀족들이 화려한 원무곡에 몸을 맡기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라.

 

 'bald'는 대머리라는 뜻이면서 미국의 국장(國章)인 'bald eagle'에서처럼 새나 짐승의 머리가 하얗다는 의미도 있다. 이 말은 기원 전 1500년 경 지금의 독일과 불란서 지대를 주름잡던 켈트(Celt) 족의 말 'bal'에서 유래했는데 '번쩍이다' 혹은 '희다'는 의미였다. 그 사고방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우리는 'bald eagle'을 '대머리 독수리'라고 번역하지 않고 '흰머리수리'라 풀이한다.
 
 최민수 편 <우리말 어원사전>에 따르면 불알은 우리 말 고어 'ㅄ알'에서 왔단다. 'ㅄ'가 중세기 경에 '씨'로 발음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알'은 예나 지금이나 알(卵)을 뜻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ㅄ알'이 씨알이 아닌 불알로 발음이  바뀐 것이다. 그러니까 불알은 씨가 들어 있는 알이라는 뜻이다. 기껏 고환의 생김새가 둥근 것에 착안점을 둔 양키들의 'balls'보다 우리의 불알은 이처럼 생리학적 의학적 기능을 중시했다는 사실이 실로 자랑스럽다.

 

 '그 눔은 배짱이 있어' 할 때 배짱은 '배(腹)장(腸)'을 뜻한다. 영어로도 'He has guts'라 하지만 더 질탕한 속어로는 'He has balls' 라 한다. 사실 사나이의 용기와 배짱은 불알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옛날에 할머니가 '그런 놈은 불알을 떼어 버려야 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켈트 족의 번쩍인다는 의미의 'bal'과 기원전 4세기의 고대 인도 범어로 불을 'pu(푸)'라고 했던 것도 어원학적으로 맥락을 같이한다. 게다가 고대영어에서는 불을 'boel'이라 했으니 이것은 우리말의 '불'에 얼마나 가까운 발음인가.  우리말 고어사전에 '불'은 옛날 말로 '블'이라고 나와 있다. '붉다'는 불이 붉게 보인 데서 유래했다. '밝다'와 '붉다'는 둘 다 '아래 아'에 'ㄺ'이 붙은 동일한 단어에서 생겨났다. 우리 선조들에게 붉은 색은 밝은 색이었다. 그것은 또 환한 불빛이기도 했다.  이제 당신은 깨달을 것이다. '둥근 것 = 불알 = 춤추는 것 = 번쩍이는 것 = 흰 것 = 빛 = 불 = 붉음 = 밝음'이라는 어원학적 등식이 너끈히 성립된다는 결론을.

 

 새해가 밝아 왔다. 붉고 둥근 해가 둥실 떠오르는 장면이다. 새해 벽두에 당신은 샹들리에 불빛이 휘황한 무도회에서 춤을 추면서 내심 밝고 명랑한 한해가 되기를 기원했을지도 모른다. 한자로 '밝을 명(明)'이란 해와 달이 합쳐진 글자다. 해도 달도 야구공도 불알도 하나같이 원형(圓形)인 것을 모름지기 당신은 기억할 것이다.

 

© 서 량 2008.01.06
--뉴욕중앙일보 2008년 1월 9일에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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