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살의 백인환자를 보았지. 얼굴이 배추 속살처럼 희뿌연 키가 큰 남자를. 이놈은 결혼한지 14년이 돼서 도저히 와이프를 견딜 수 없어 집을 나온지 7년이 지났대. 지금 13살 짜리 아들과 10살난 딸이 있다지.
그놈 와이프는 남미 페루에서 온 여자. 영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고집이 세고 사사건건 남편에게 잔소리하고 훈시하는 이상한 여자래.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 직성에 맞아야 속이 편한 여자. 소위 요새 여자란 말이다. 게다가 남동생을 불법으로 미국에 데려와서 한 집에 같이 살고 있대나. 이 불한당 같은 놈은 또무슨 범죄조직에 속해 있다는 거야. 우리말로 조폭이래.
내 환자 딸이 애비에게 고자질을 하기를 외삼촌이 아무런 이유 없이 자꾸 자기 배를 만진다고 했어. 40대 초반인 이놈의 자식이 아마 변태끼가 있는 모양이지. 그래서 내 환자는 경찰서에 가서 자기 처남이 지 딸을 괴롭힌다고 고발을 했대잖아. 근데 일이 꼬일라니까 공교롭게도 그 다음날 부부싸움을 했는데 와이프가 빗자루로 남편을 두들겨 팼대더라. 남자 위신이 말이 아니지. 그래서 내 환자가 와이프 얼굴을 때렸어. 와이프는 얼굴에 립스틱으로 피처럼 뻘겋게 지도를 그린 다음 저도 경찰서에 가서 남편에게 맞았다고 울며불며 난동을 쳤대.
다음날 둘이서는 법정에 불러 갔지. 근데 마침 또 판사가 술주정뱅이로 소문이 난 판사였어. 이 양반은 부부싸움에는 관심이 없고 아동복지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인지라 내 환자와 와이프가 자식들 앞에서 싸운 것이 괘씸하다 해서 밑도 끝도 없이 아동복지국에 둘을 넘겼대요. 참 기가 막힐 노릇이라.
지난 크리스마스 때 사건이 터진 거야. 내 환자가 운전을 하는데 갑자기 차에서 휘발유 냄새가 났다는 것. 그 순간 내 환자는 아, 이것은 필시 내 처남이 나를 죽일려고 휘발유 라인을 짤라 놓은게 분명해! 하는 생각으로 곧바로 인근 경찰서에 갔대요. 경찰이 횡설수설하는 내 환자를 보고, 야! 너 병원에 가 봐라 하고 충고를 했더니 내 환자는 얼른 병원으로 갔대.
응급실 의사가 그를 당장 정신병동에 입원을 시켰지. 3주를 정신병동에서 지낸 그는 퇴원하자 마자 나를 찾았다. 그 병원의 엉터리 정신과 의사는 아닌 밤중에 그를 정신분열증이라고 진단을 내렸다는 거야. 그 진단서가 법정으로 갔대지 뭐야. 와이프는 신바람이 났지. 내친 김에 자식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라고 요구를 하면서 난리 부르스를 쳤대요.
법정에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거는 진단이 잘못된 것이고 내 환자는 못돼먹은 와이프에게 지금 당하고 있다, 법정은 부디 선처를 바란다, 하는 식의 편지를 썼다. 앞으로 일주일 후에 내 환자는 다시 법정에 가야 해. 어떤 판결이 날지 궁금해 죽겠어. 그는 단지 자기 자식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보고 싶다는 것이 소원인데.
© 서 량 2008.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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