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얘기

|환자얘기| 검은색 찝차

서 량 2008. 1. 19. 10:14

40 중반 이혼녀 갈색머리 웬디는 혼자 살면서 인근 수퍼마케트에 일하고 있다. 그녀는 얼마전 아침 출근길에 은행 자동머신에서 현찰 200불을 찾았대. 근데 은행에서 직장으로 운전을 하는 도중 백미러에 검은색 찝차가 줄곧 따라오는 걸 봤다는 거. 이게 만약에 영화라면 어떤 배경음악이 나올지 몰라. 아마 재즈음악이 어울릴 거야. 딩둥딩둥 딩기딩기 치치치치~

 

검은색 찝차는 수퍼마켓 주차장까지 웬디를 따라 와서 바로 옆에 주차를 했다는 거. 찝차에서 험상굳게 생긴 흑인청년이 급하게 내리더니 웬디에게 와서 운전석 창문을 내리라고 손으로 모션을 취했대. 얼떨결에 겁이 나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놈 왈 아까 현찰머신에서 찾은 돈 200불을 내놓지 않으면 찌르겠다며 시퍼런 칼을 들여대더래. 웬디는 혼비백산해서 한국여자는 아니지만 어마나! 하며 소리치며 현찰 200불을 주고 흑인청년은 흰 이를 드러내면서 씩 웃으면서 떠났대.

 

웬디는 수퍼마켓으로 뛰어 들어가 자기 보스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보스는 경찰을 부르고 삽시간에 경찰들이 들어닥쳤다는 거. 그 수퍼마켓에는 옥외 감시 카메라가 있기 때문에 당장 필림을 돌려서 웬디가 주차한 곳을 확대시켜 검사를 했다는 거. 그런데 이걸 어쩌면 좋아. 웬디가 차를 주차하고 차에서 내릴 때까지 웬디 옆에 검은 찝차는 커녕 차 양쪽이 허허 벌판이었다는 거야. 웬디도 그 필림을 같이 봤는데 이거 뭐야. 기가 막히지 않겠어. 진짜.

 

경찰은 웬디가 현찰 200불을 찾았다는 그 은행의 감시 카메라도 조사했대. 근데 현찰을 찾는 웬디의 모습은 필림 어디에도 없었다는 거야. 그녀는 결국 경찰에게 허위보고를 한 경범죄로 체포 당하고 며칠 후에 판사가 정신감정을 받으라는 판결을 내린 결과 나한테 오게 된 거라.

 

웬디는 엉엉 울면서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하소연한다. 내가 보기에도 그녀는 이때까지 정신병 치료 경력이 없는 나나 당신 같은 정상인으로 보인다. 나는 그녀가 없었던 일을 허위조작해서 경찰에 보고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진심으로 말했다. 아무리 경찰도 판사도 웬디를 미친사람 취급을 했지만.

 

나는 웬디에게 정신과 전문의 입장에서 그녀가 미쳤다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고 말했어. 그렇다고 해서 지극히 정상이라는 진단도 내리지 못하겠다고 했지. 내 실력의 한도를 인정한 거야. 그러나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간질병 증세에 그런 증상이 있을 수 있으니 신경과전문의에게 가 보라고 하면서 나랑 친한 신경과 의사를 소개시켜 줬다.

 

오늘 신경과 친구에게 전화를 했지. 그놈 왈. 웬디를 철두철미하게 조사하고 뇌파와 MRI 검사까지 다 했는데 모든게 다 정상으로 나왔다는 거야. 그래서 자기는 신경과 진단소견을 정상으로 할테니까. 나도 소신껏 하라는 거라. 어쩌지. 나도 웬디를 정상이라고 진단을 내려야겠나 봐. 당신이 듣기에는 어때. 당신 의견을 한 번 말해 봐. 상식적인 차원에서, 응?

 

 © 서 량 2008.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