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글로리아가
서른 중반에 이혼하고 마흔 좀 넘어서
수면발작(narcolepsy) 증세가 오기 시작한 거야
나이 많은 애인과 얘기를 하다가
수퍼마켓 계산대 앞에서
혹은 혼자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잠에 빠지는 병
평화롭게 숙면하는 고운 잠이 아니고
불시에 전신근육이 마비되면서
순식간에 잠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증세
지난 주에는 상담 도중에 이혼한 딸 얘기를 하다가
끙! 하며 이상한 소리를 내며 짧게
한숨을 쉬는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툭! 꺾는 거야
원작자의 사랑을 받지 못해
스토리 도중에 죽는 여자가 영화에서
고개를 옆으로 꺾듯이 말이지
글로리아, 글로리아 불러봐도 대답 없이
귀밑머리에 짙은 안개만 흐르는 오십대 초반
그 여자가 삼 분쯤 지나 눈을 쓱 뜨는 거야
폭포수 눈물 속 삶과 죽음 사이
감옥에서 풀려나 엉엉 우는 빨강머리 글로리아
내 앞에서 급작스레 잠이 들어 무안하고
내가 자기 이름을 자꾸 불렀을 때
너무나 응답을 하고 싶었지만
영 입을 열 수 없어서 슬펐다며
엉망진창으로 코를 훌쩍이는 글로리아
© 서 량 2005.11.18
--세 번째 시집 <푸른 절벽>(도서출판 황금알, 2007)에서
시집 소개: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60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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