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5. 바둑아, 바둑아, 이리 와

서 량 2007. 9. 22. 05:04

 오래 전 초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 첫 페이지에 나왔던 ‘바둑아 바둑아, 이리 와. 나하고 놀자’ 하는 부분을 당신은 기억하는가.

 

 왜 우리의 국어교육은 강아지와 놀고 싶다는 의지의 발동으로 시작하나 하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하다못해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 나하고 공부하자’ 하지 않고 하필이면 ‘나하고 놀자’ 했는가 말이다. 청운의 뜻을 품고 학교에 간 첫날에 듣는 말이 기껏 강아지와 어울려 놀라는 메세지였다니.

 

 ‘놀다’라는 뜻의 ‘play’는 'plegian'이라는 13세기 초엽 고대영어로 원래 ‘운동하다; 까불다; 음악을 연주하다’라는 의미였다. 세월이 흘러 ‘돈 많은 난봉꾼’이라는 뜻의 ‘playboy'는 1829년에 태어났고 'play with oneself (자신과 놀다)'라는 말이 '자위행위를 하다'라는 뜻이 된 것은 1896년이었다.

 

 프로이드는 일찌기 한 개인의 정신을 평가하는데 ‘work, play and love (일하고, 놀고 사랑하는)’ 3대요소가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사랑을 본능이라 간주하고 일에 충실한 것을 현실로 쳤을 때 '논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시인이자 소아과의사면서 정신분석가인 영국의 도날드 위니컷 (Donald Winnicott: 1896-1971)은 ‘과도기 사물 (transitional object)’이라는 개념을 발견했다. 이것은 즉 서너 살 나이의 어린애가 들고 다니는 담요나 장난감 따위를 뜻한다. 그 발육 시기를 ‘과도기 과정 (transitional stage)'이라 하고 그 공간을 ’과도기 공간(transitional space)'이라 일컫는다. 혹자는 이것을 ‘제 3의 공간’이라 명명한다.

 

 ‘과도기’는 꿈과 현실의 중간에 있다. 이곳은 후미지고 아늑한 공간이면서 꿈의 특징과 현실적인 요소가 동시에 공존하는 텃밭이다. 여기는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비몽사몽 지역이다. 이곳이 바로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 하는 말소리가 귀에 쟁쟁한 어린이 놀이터다.   만화영화 '찰리 브라운'의 주인공인 찰리(Charlie)는 늘 심한 우울증세를 보인다, 그의 여동생 샐리(Sally)는 걸핏하면 사내애들에게 새빨간 하트를 허공에 훨훨 날리며 함부로 연정을 품는 소위 좀 헬렐레한 계집애. 게다가 우리의 양키 바둑이 스누피(Snoopy)는 천둥벌거숭이로 뛰어다니고 있다. 이렇듯 들쑥날쑥한 등장인물 중에 그래도 가장 원만한 성격을 유지하는 어린이는 늘 담요를 어깨에 메거나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라이너스(Linus)다. 이유인즉 그가 애지중지 들고 다니는 담요, 시큐리티 블랭킷(security blanket)이 그에게 한없는 평안과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라이너스는 이른바 시쳇말로 심리적인 ‘빽’이 든든한 어린이다.

 

 위니컷이 '과도기 사물'에 대한 논물을 발표한 해가 1953년이었다. 같은 해에 미국에서는 정신이 불안정하기로 세상에 소문난 휴 헤프너(Hugh Hefner)가 '플레이보이' 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인류 역사상 헤프너는 여성을 남자들의 '과도기 사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다. 사실 여성이란 인간의 영원한 '과도기 현상'이면서 '제 3의 공간'이 갖는 몽롱하고 편안한 실존이다.

 

 우리는 어른이 돼서도 너 나 할 것 없이 '시큐리티 블랭킷'을 들고 다니고 싶다. 우리가 매달리는 추상적인 장난감은 무엇일까. 그것은 당신을 밤낮으로 사로잡는 취미생활이다. '일하다'에 상반되는 '놀다'라는 개념이 선물하는 삶의 저력 같은 것이다.

 

 오늘도 당신은 골프에 몰두한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고스톱을 칠 수도 있으리라. 우리의 '과도기 사물'이란 밤낮없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연습하는 열정, 혹은 우리가 사랑과 예술을 위하여 혼심을 불사를 때 오는 마음 든든함이다.

 

© 서 량 2007.04.02
-- 뉴욕중앙일보 2007년 4월 4일 서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