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박사; 닥터'로 사전에 풀이된 'doctor'는 라틴어의 docere(show; teach: 보여주다; 가르치다)에서 유래했다. 의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사를 의사 선생님이라 부른다.
가르치다는 의미의 'teach'도 고대영어의 tocan(보여주다; 가르치다)에서 나온 말이다. 보여주는 물건이라는 뜻의 token(징표; 토큰)도 같은 어원이다. 그래서 14세기 초에 'teacher'라는 단어가 태어났다. 그 즈음 또 'teacher'에는 두 번째 손가락(index finger: 검지)이라는 뜻도 있었다. 당시의 양키 교사들이나 우리의 훈장들이 학생들을 가르칠 때 오른쪽 검지를 삿대질하듯이 휘두르는 장면이 눈에 선하지 않은가.
'선생(先生)님'은 한자와 우리말의 조합어다. '먼저 선(先)'과 '날 생(生)'은 '먼저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 이 유교적인 사고방식에 의하면 교수방법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인생을 오래 산 사람들이 선생님이란다.
스승은 옛말로 '스숭'이었다고 고어사전에 나와 있는데 스숭에는 무당이라는 뜻도 있었다. '스승'이 사승(師僧: 현대말로 선생님 중)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순수한 우리말인 '중'은 한자어인 승(僧)이라는 발음이 변한 것. 이것은 즉 우리 조상들이 무당과 승려들을 스승으로 삼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67년에 이미자가 힛트친 '님이라 부르리까'라는 유행가가 있다. 그 천연덕스러운 가사의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님이라 부르리까 당신이라고 부르리까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참고 사는
마음으로만 그리워 마음으로만 사무쳐...'
'님'을 한자로는 '담임(擔任) 선생님'에서처럼 '맡길 임(任)'으로 표기한다. 기독교의 '주(主)님'의 '님'도 같은 어원이다. 나이 지긋한 남편이 아내에게 '임자, 우리 고만 자리에 듭시다'할 때의 임자도 주인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믿고 좋아하는 상대를 내 몸과 마음의 주인으로 삼고 싶은 것이다. 영어에서도 15세기 중엽부터 쓰이기 시작한 'Mister'가 master(주인)이라는 말에서 파생됐다는 사실도 마찬가지 이론이다. 시시때때 외로움을 타는 현대의 우리들이 웹사이트에서 생면부지의 상대를 '님'이라 부르는 것도 서로에게 마음을 맡긴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쯤해서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님'이라 부르는 이유를 쉽게 터득할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을 공존시키고 싶은 심리에 휩쓸린다. 존경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기가 힘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닐까.
어머님, 선생님, 형님, 누님, 손님, 서방님, 사모님, 사장님, 부처님, 하나님, 임금님 할 때의 '님'은 옛말에서 '임'과 마찬가지로 쓰였다. 그래서 '임금님'의 고어는 '임군(君)'의 끝에 다시 '님'자를 붙인 '임군님'으로서 처가집이나 역전앞에서처럼 같은 뜻의 말을 되풀이하는 단어다. 나중에 발음의 편의상 임군님이 임금님으로 변했다.
당신은 황진이가 사랑의 정한을 감칠맛 나게 읊은 이 시조를 기억할 것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밤에 굽이굽이 펴리라'
이때 '어른님'의 '님'도 사랑하는 상대의 칭호다. 게다가 어른이라는 말은 어원학적으로 '어울리다; 어르다; 교합(交合)하다'는 뜻이었다. (김민수 편 '우리말 어원사전': 태학사, 1997: 726쪽) 그러기에 16세기 중엽에 머리 좋고 맵시 좋은 우리의 명기(名妓) 황진이가 호명한 '어른님'은 자기와 '교합하는 애인'을 뜻하노니, 어른님 오시는 밤이란 문자 그대로 'Rated R'의 밤이 아닐 수 없다.
© 서 량 2007.05.01
-- 뉴욕중앙일보 2007년 5월 2일 서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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