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를 맞거나 꾸지람을 들은 후에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을 우리 속담에서 ‘매끝에 정든다’ 한다. 자극을 가하는 쪽과 받는 쪽이 서로에게 점점 익숙해지면서 정이 두터워지는 인간의 속성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맞다’는 ‘서로 어긋나지 않고 틀림이 없다, 일치하다’라는 의미. 답을 옳게 ‘맞추다’ 할 때는 쌍방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하다못해 남녀가 입을 맞출 때도 입과 입을 일치시켜야 한다.
그러나 또 한편 ‘맞다’는 매를 맞을 때처럼 ‘구타 당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를테면 ‘너 맞고 싶어?’ 하며 누가 주먹을 불끈 쥔다면 그것은 명실공히 그 사람이 상대방을 때리고 싶다는 의도를 표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약 당신이 상대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싶은 심정에서 ‘그건 참 맞는 말씀이에요’ 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생각이 그 사람의 생각을 쾌적하게 힛 (hit) 했다는 뜻이다.
‘touch’라는 개념은 14세기 초엽에 불란서 고어 ‘touche’와 라틴어 ‘toccare’에서 거의 동시에 출발한 것으로 문헌에 나와 있는데 물론 그 원래의 뜻은 ‘건드리다; 만지다; 때리다’였다. 바로크 시대의 ‘토카타(toccata)’도 그 당시의 키보드 악기를 만지고 두들기고 때리면서 테크닉을 과시하는 연주형식을 지칭하는 음악용어였다.
‘touch’는 또 14세기 중엽부터 그 말이 ‘마음을 건드리다’라는 추상적인 의미로 바뀌기 시작했고 17세기 경에 완전히 ‘감동을 주다’라는 뜻이 확립됐다. 소위 요새 우리말로 ‘감동을 먹다’ 혹은 더 신식말로 ‘필(feel)이 꽂히다’라는 의미가 돼버린 것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감동시키기 위하여 상대를 건드리고, 만지고, 때리는 과정을 거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실 이 세 가지 소통 방법은 자극의 강도가 약간씩 다르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자극의 형태와 강도가 교묘해지면 애무(愛撫)가 되기도 한다. 열 살도 채 못된 초등학교 시절에 좋아하는 같은 또래 계집애에게 물총을 쏘아대던 기억이 난다.
‘touche’는 펜싱 용어에 ‘칼이 몸에 닿다 (칼에 찔리다)’라는 뜻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현대영어 슬랭으로 ‘Touche! (투쉐이!)’ 하면 ‘I am touched!’라는 뜻으로 ‘내가 졌다!’는 의미다. 말싸움이 붙었다가 나중에 한 쪽이 할 말이 없을 때 쓰이는 말. 우리는 상대방에게 맞는 순간 감동을 받으면서 패배를 자인한다.
오감(五感)에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있다. 우리의 일상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만지는 감각으로 점철된다. 시각은 적당한 거리감이 있어야 자극이 뚜렷해지는 반면에 촉각은 거리감을 철저하게 거부함을 전제로 한다. 불란서 페니미즘 철학자인 뤼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가 설파했듯이 시각은 대상과의 적당한 거리를 둔 차갑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내세우지만 촉각은 따스하고 정겨운 친밀감을 위주로 한다.
촉각은 두 생물체의 경계가 맞닿을 때만 이루어진다. 이른바 우리 속어에 남자가 여자를 ‘건드리다’는 말은 남녀의 교합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감각은 본래의 영역을 떠나서 하나의 개념으로 변모한다. 이를테면 당신이 좋아하는 양키가 보내온 이메일 끝에 ‘Keep in touch’ 했다면 그것은 절대로 자기를 만져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서로 연락하면서 지내자는 추상적인 진술이다. 마찬가지 논법으로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누가 ‘님의 시에서 향기를 느낍니다’ 했을 때 지성적인 당신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드려서 코를 킁킁거리는 행동일랑 진작에 삼가야 하는 것이다.
요사이처럼 인터넷을 통한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이 이루어지는 세상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 어디에서나 누구하고라도 교신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접속’에 국한됐다 뿐이지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접촉’이 될 수 없다.
이광조의 힛트곡에 그려진 현대인의 사랑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밀레니엄 시대에 우리의 소통과 교감은 사이버 공간이라는 전자매체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 지구촌의 상호거리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지구인들은 건드리고 만지고 때리면서 서로 감동을 받고 싶어하는 심리가 그만큼 더 강해지는 것이다.
© 서 량 2006.09.19
-- 뉴욕중앙일보 2006년 9월 20일 서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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