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유럽의 켈트(Celt)족이 쓰던 달력은 10월 말에 한 해가 끝났다. 기원전 500년경 당시의 미신에 따르면, 그들의 연말인 10월 말일은 모든 떠돌이 귀신들이 이듬해에 기거할 사람 몸을 점령하기 위하여 날뛰는 날로서 죽은 영혼들과 산 영혼들이 뒤범벅이 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귀신에게 씌우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10월 31에 동네방네 떼지어 쏘다니며 소란을 피우고 귀신 쫓는 행사를 벌렸다. 그 날을 이름하여 ‘핼로윈데이(Halloween day)’라 했는데 어원학적으로는 ‘모든 성현의 날’(All-Saints Day)’이라는 뜻이다.
이열치열의 원칙 대로 귀신을 쫓는 방법은 자기 스스로 귀신 짓을 하는 것이다. 요사이에도 핼로윈데이에 귀신이나 악마 복장을 입은 아이들이 남의 집 문을 두드리며 “Trick or treat!” (※야후 사전에는 “장난이요 과자요”로 우스꽝스럽게 번역돼 있음)라고 소리친다. 캔디나 초코렛을 주지 않으면 그 집 벽에 달걀을 던지거나 차고 문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려서 집주인을 골탕 먹인다.
그 날은 누구나 귀신, 도깨비, 악마, 지옥 같은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악마의 원조인 사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도 괜찮은 날. 신과 악마의 투쟁에 대한 으스스한 상상도 절로 하게 된다.
44세에 장님이 된 존 밀턴(John Milton)이 59세에 출간한 ‘실낙원(Paradise Lost·1667년)’은 신과 악마와 아담과 이브의 행로를 구약성경에 입각해서 쓴 장편서사시다. 천사들의 수장이던 루시퍼는 신에게 반감을 품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악마의 노선을 걷는다. 그는 뱀으로 둔갑하여 이브를 유혹해서 금단의 열매를 먹게 한다. 이윽고 아담도 덩달아 같은 죄를 저지른 후 두 남녀는 천상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밀턴은 인류 최초의 부부가 당하는 이 비참한 현장을 ‘다행스러운 타락 (fortunate fall)’이라 묘사했다. 지혜의 열매를 따먹은 벌로서 지혜를 얻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담(Adam)은 히브루어의 ‘먼지’ 혹은 ‘흙’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고 이브(Eve)는 ‘생명’이라는 단어와 뿌리를 같이한다. 아담이 심심해 하니까 그의 갈비뼈 한쪽을 떼내 이브를 만들었다는 신의 특별한 배려에서 급기야 무의미한 티끌에 생명이 입력된 것이다. 그렇다. 당신도 나도 티끌에서 태어난 것이다.
애인 비아트리체의 갑작스러운 사망 후, 단테가 쓴 신곡(神曲·1321년)의 지옥편(Inferno)에는 머리에 뿔이 달린 마귀들이 죄를 진 인간들을 채찍으로 때리고 생살을 물어뜯는 장면이 모골이 송연하도록 묘사돼 있다. 지옥은 악마와 마귀들이 판을 치는 곳. 물론 지옥의 총대빵은 루시퍼다.
루시퍼(Lucifer)의 어원이 샛별(morning star)이면서 유황(sulfur)이라는 것을 당신은 혹시 아는가. 밝기의 국제단위로 쓰이는 럭스(lux)가 루시퍼와 같은 말뿌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옥에서 타오르는 불도 유황불이요, 성냥도 유황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빛의 기본단위가 악마의 이름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참 역설적이다. 예수보다 563년 전에 태어난 인도의 왕자 싯달타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6년 동안 뼈아픈 고행을 하던 중 어느날 새벽 샛별을 보고 정각(正覺)을 얻었다는 것도 루시퍼 덕분이라는 추론이 성립된다.
인류의 역사는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에덴동산의 낙원을 잃어버린 것이 우리의 대 선조가 최초로 겪은 대역경이었다. 장님이 된 밀턴이 딸에게 딕테이션을 해서 쓴 ‘실락원’도, 애인과의 사별 후 8년 동안에 걸쳐서 단테가 쓴 ‘신곡’ 도 하나같이 역경의 산물이다. 이 두 작품은 인간의 타락과 사후세계를 묘사한 불후의 명작으로 지금도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신과 악마의 투쟁으로 인하여 이렇듯 우리의 문화와 예술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 서 량 2006.10.31
-- 뉴욕중앙일보 2006년 11월 1일 서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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