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할머니가 ‘사람이 눈치가 있어야 절에 가도 새우젖을 얻어먹는다’ 라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우리말 어원사전에 의하면 ‘눈치’는 ‘눈(眼)’과 ‘한 치, 두 치’ 하는 치수의 기본 단위가 합쳐진 말이라 한다. 쉽게 말해서 ‘눈’으로 재는 ‘치수’를 뜻하고 그 눈대중이 빠른 사람을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부른다.
눈치라는 의미에 꼭 맞는 단어가 영어에는 없지만 가장 가깝게는 ‘smarts’라는 표현이 있다. 1970년 대에 만들어진 속어로 복수형 명사다. ‘He has street smarts’ 하면 세상 물정에 밝다는 의미. 우리말 관용구에 ‘척하면 삼천리’ 라는 표현도 눈치와 상황판단이 재빠르다는 뜻이다.
통상 ‘영리한, 똑똑한, 총명한’이라는 형용사로 익히 알려진 ‘smart’를 동사로 쓸 때 그 뜻이 ‘욱신거리다, 따끔거리다, 쓰라리다’라는 의미인 것을 스마트한 당신은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My eyes smart’ 하면 눈이 따끔따끔하다는 뜻이고 ‘My pride smarted’ 하면 자존심 상했다는 말이 된다.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뜻이 도대체 왜 아프고 쓰라리다는 뜻과 공존하는 것일까.
‘smart’는 12세기 중엽 ‘깨물다(bite)’ 혹은 ‘남을 해치다(hurt)’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었다. 13세기 초엽에 원래의 뜻이 사라지고 ‘아프고 쓰라리다’는 의미로 변했다.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뜻이 다시 첨가된 것은 14 세기 경이었다. 근 200년에 걸려서 한 단어가 겪은 변천과정이 참으로 신기하다.
독일어의 ‘schmerzen’도 ‘smart’와 말의 뿌리가 같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자주 쓰는 독일어로
‘mittelschmerz’가 있는데 영어로 직역하면 ‘middle pain’. 월경과 월경 중간에 발생하는 배란통을 뜻한다.
인간의 부드러운 감성에는 서로를 쓰다듬고 덮어주고 위로해 주는 미덕이 있다. 반면 차가운 지성은 예리한 판단과 비판력으로 상대를 파헤치고 허점을 찔러 마음을 쓰라리게 한다. 따스한 정서에는 애타적(愛他的)인 요소가 있고 냉철한 지성은 다분히 이기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8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똑하고 영리한 양키들은 서로를 날카로운 말로 깨물고 해치고 아프고 쓰라리게 했던 것이다. 서구적인 지성은 인간과 자연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해체시키는 아픔과 고난의 역사다.
우리는 전 지구촌이 서구화의 와중에 휩쓸리는 풍조 속에 생존하고 있다. 우리들 의식 속에 뿌리 박힌 동양의 지혜가 서로의 ‘눈치’를 잘 살펴서 평화와 화합의 분위기를 조성했으면 하는 소망이 누군들 없으랴. 그러나 보라. 오늘도 서구적인 지성으로 무장한 ‘스마트’한 인텔리들이 서로를 아프고 쓰라리게 하는 우리의 일상을.
© 서 량 2006.08.22
-- 뉴욕중앙일보 2006년 8월 23일 서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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