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9

지구에 없는 사람 / 김정기

지구에 없는 사람 김정기 꼭두새벽부터 저녁나절까지 기다리고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 오대양 육대주에 산맥마다 바다마다 뒤져보아도 도시나 촌락, 골목마다 집집마다 살펴보아도 유엔빌딩 사무실 문을 열어도 우리 교회 앞자리 셋째 줄에도 곤 색 양복에 자주색 넥타이 달이 지고 해가 떠도* 산맥이 뻗어가고 바다가 넘쳐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 월남의 백마부대 다낭 항구에도 오끼나와 정보학교 교정에도 종로5가166번지 본적지에도 태극기 휘날리던 3사단 연병장에도 수색대를 풀어 놓았지만 찾을 수 없단다. 신발 끈을 다시 묶고 땅 위에 바다 속에 현미경을 들고 나서 보다가 이제는 내가 지구의 옷을 벗고 천사의 날개 달고 창공을 날아 거기서 보았다. 만났다. 지구에 없는 사람을. *졸시 “당신의 군복..

지구의 꽃 / 김정기

지구의 꽃 김정기 세상의 꽃들이 울고 있다 피는 꽃마다 맺혀지는 눈물방울이 지구 위에 물이 된다. 빌딩 사이에 흰 꽃 터널을 이룬 배꽃 그늘에서 그는 혼자 서있다. 하늘에서 물줄기가 떨어진다는 놀라움이 난해한 직선을 그린다. 꽃에서 살 냄새가 난다 생살 썩는 내 아기의 비릿한 새 살 냄새가 난다. 돌계단위에 떨어져 있는 꽃잎들이 우주에서 돌아온 사람의 발목을 잡는다. 영원한 것을 위하여 버려야하는 꽃잎들이 땅 위에서 비를 맞으며 연주하는 멘델스존의 피아노 트리오 1번 D 마이너 지구는 쥐 죽은 듯. © 김정기 2011.04.28

지구의 물 / 김정기

지구의 물 김정기 당신의 하늘에 남보라에 잉크를 풀었다 허리춤이 살아나는 관능의 물이 호머*의 포도주가 되어 지중해를 채웠고 물가루가 당신의 멋에 분해되어 몸속으로 스며들 때 어려운 색깔이 숨죽이며 번져 당신은 한 방울 유쾌한 뉴욕의 물. 마음속에 숨어있던 파인 구멍을 가볍게 덮어주는 달빛 온기를 잃지 말라고, 물의 씨를 말리지 말라고, 옥구슬이 되어 분만 되는 물방울은 여자에 엮이어 땅으로, 흙으로 스며든다. 스며든다. *19세기 미국화가 © 김정기 2010.07.27

|詩| 눈을 크게 뜨다

눈(眼)은 야만적인 상태에 존재한다 -- *안드레 브르통 (1926) 빅뱅이 사라지자 금세 새롭게 생겨나는 샛별을 보세요 구름빛 소파에 앉아서 당신이 말한다 빨강 노랑 파랑 풍선 낯익은 얼굴들을 봐봐 빅뱅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무더운 공기 사방팔방 풀려나는 지구보다 몇 백 배 더 큰 생물 무색 무취 무미 아메바 짚신벌레 등등 득달같이 달려드는 이 모습 어디가 야만적이지 저 샛별 어디가 야만적이지 * Andre Breton –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성명서를 발표한 프랑스 정신과의사, 시인, 초현실주의의 태두 시작 노트: 정신과의사 앙드레 브르통은 프랑스에서 초현실주의 시를 쓰기에 바빠서 '의사짓'을 포기했다. 그 즈음 미국의 소아과의사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즈는 꼬박꼬박 의사짓을 하면서 시시때때 처방전에 시..

2022.11.26

|詩| 진공소제기

해와 달과 지구가 서로를 끌어당긴다 해와 달과 지구가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안달을 부리는 거예요 그거는 해와 달과 지구는 전생에 팽팽한 관계였대 그 쓸쓸하고 팽팽한 내막을 아무도 모른대 그들은 서로를 힘껏 빨아드리면서 점점 더 부풀어오를 것입니다 썰렁한 우주를 헤집고 해와 달과 지구의 먼지와 코로나 바이러스를 인정사정없이 흡수하는 휴대용 진공소제기 공허한 진공소제기 외로운 진공소제기 그게 당신의 유일한 무기일 것입니다 아까 그런 흉기를 손에 든 내 자세를 생각했다 © 서 량 2020.08.23

2020.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