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생각한다
한혜영
오래 전부터 이승의 마지막 장면을 상상했다 가다가 돌아보고, 가다가 또 돌아다보는
그러다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다
조팝꽃 같은 안개 흐드러지게 피어난 저승 문턱에 막 당도했을 때
또 하나의 내가 나를 손잡아 당겨주는 모습
하필 지구라는 행성으로 가서 애썼다 고생했다 축 늘어진 어깨 두들겨주던
나를 보았을 때 비로소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엄마가 엄마를 만나 달빛 하얀 길을 두런대면서 걸어가고
이태 전에 떠나간 조카아이가 제 그림자 만나 어깨 단단하게 거는 모습
이승 얘기 주저리주저리 풀어놓는 것만으로도 백년쯤은
침묵 없이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불현듯 궁금해졌다
저승에도 서울역 같은 시계탑이 있을까?
있다면 첫눈 내리는 날 나하고 만나자는 약속을 거기서 해야지
생각만으로 가슴이 쿵쿵 뛰는 거였다
<현대시학> 201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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