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증 6

|컬럼| 455. 문 닫고 지내기

문이 있고 통로가 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잔디밭 돌길. 문이 반쯤 열려 있는 서재를 지나 반들거리는 복도가 부엌에 이른다. 문은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는 칸막이를 상징한다. 문은 외부자극을 차단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오피스 문을 닫은 채 직장이나 연구실에서 열렬히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혼자 추구하는 작업에 심취하여 몰아(沒我)의 경지에 빠지는 과학자나 예술가들은 남과 소통하고 싶은 기색을 도통 보이지 않는다. 페이퍼워크가 산더미로 쌓인 병원에서 컴퓨터를 두들기는 중 전화가 온다. 오래 소식이 없던 친구가 어떻게 지내냐 묻는다. 야, 나는 날이 가면 갈수록 ‘자폐증상, autistic symptom’이 도지는 것 같다, 하며 농담을 내뱉는다. 현대인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지낸다. ..

|詩| 낯선 사람들

어깨를 하늘로 향하는 동작 또 다른 한편 이상하다 아기 공룡 S자 모양 목 선이 참 친숙해요 당신 말이 다 맞다고 단정 내리는 순간이지 황혼 녘 아기 공룡에게 말을 붙이는 순간 내 속 낯선 사람 여럿이 뛰쳐나와 군대 식으로 뻣뻣이 서있는 모습 2중 언어 대뇌피질에 맺히는 이슬 방울 무슨 말을 해도 절대 통하지 않지 나는 내게 한참 낯선 사람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쿵 쓰러지는 아기 공룡 또 다른 한편 아무렇지 않다 무슨 말을 해도 괜찮지 그치 이제는 시작 노트: 자폐증 환자를 면담하다가 친밀한 감정이 솟는다. 내가 그의 속 마음을 전혀 몰라도 괜찮다는 생각에 휩쓸린다. 부모, 형제, 나 자신도 서로에게 다 낯선 사람들이라는 깨달음이 터진다. 비스마르크 왈, 소시지와 법에 대한 존경심을..

발표된 詩 2022.08.16

|詩| 와사비 푸른 콩

짙은 녹색이 청색에 가깝다 함박눈이 아무 때나 펑펑 쏟아진다 기약도 없이 새벽 4시에 간식을 먹는다 밖에서 무슨 일이 터지는지 더 이상 관심을 쏟지 않아도 돼 자폐증의 즐거움과 짙푸른 녹색이 서로 결이 잘 맞아요 앞서 말했듯이 꼭 그러라는 법은 없습니다 눈 시린 실내에 온통 오렌지 계통의 빛이 넘쳐나고 있어요 어찌 생각하면 속이 쓰릴 만도 하지 약손가락 손톱보다 좀 작은 크기 푸른 콩들이 막 뛰어다니네요 등을 잔뜩 꼬부린 태아 모습들 등을 잔뜩 꼬부린 생선 모습들 나는 어느새 와사비와 호흡이 척척 맞는다 ©서 량 2020.11.27

2020.11.27

|컬럼| 358. 마스크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걸어간다. 젊은 여자, 은퇴한 대학교수, 급하게 라면을 먹고 편의점을 나온 대학생, 정치적 이념이 강한 중년 남자, 또는 겁 없는 무신론자들이 제각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걸어간다. 마스크는 2020년 3월 현재 중국 우한이 발원지로 알려진 코로나 바이러스의 침투를 막아내는 방패막이다. 마스크는 투구를 쓴 고대의 병사들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적군의 화살을 막으려고 방패로 몸을 가리는 자기방어 메커니즘이다. 마스크는 절대절명의 구명책이다. 마스크는 은성한 가장무도회에 참가하는 소박한 가면이다. 마스크는 자신이 포식동물의 먹거리가 아니라는 시그널을 할로윈데이 가면의 무서운 이미지로 전달한다. 마스크는 포식성이 강한 상대방을 혼동에 빠뜨려서 내 안전을 꾀하려는 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