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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겨울 칠면조

서 량 2008. 12. 1. 00:12

 

추수감사절 연휴를 늘어지게 게으름을 피우며 지냈지.

목, 금, 토, 일, 나흘 중에 오늘이 마지막 휴일이야.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애들도 둘 다 집에 안 오고 해서 마침 핑계낌에

내가 평소에 반감을 품고 싫어하는 칠면조를 안 먹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킥킥.

 

때때로 자폐증적인 삶을 살고 싶고 그걸 실천에 올릴 수 있는 유일한 챈스가 연휴다.

이번 연휴에는 지붕에 올라가 경사가 급하지 않은 곳에 수북히 쌓여있는 낙엽을 다 치우고

비닐 쓰레기 자루를 빵빵하게 4개을 채우고 내려 온 것 빼 놓고는 밤낮으로 딩굴딩굴 놀았어요.

이틀인가를 이빨도 닦지 않았어. 만사가 귀찮고 허전하고 바보천치스러웠어. 이빨을 닦아서 뭐해.

 

티브이에서 흘러간 명화, 길고 지루한 <앵무새 죽이기>의 그레고리 펙

옛날식 좋은 표준발음으로 하는 영어도 다시 듣고 새삼 감탄하고,

전에 반만 봤던 연쇄살인을 주제로 한 스릴러도 처음부터 차근차근 끝까지 다시 보고,

최근 한국영화도 세 편이나 무례하게 다운로드 받아서 봤더니 갑자기 폭식을 하고 난 후에 생기는

위장장애처럼 머리 속이 더부룩하고 영화 몇몇의 테마가 뒤범벅이 되는 거야. 머리가 엉망진창이야.

 

내일은 현실로 돌아가야 해. 현실을 경배하고 현실에게 아부하고

현실을 연극하기 위하여 면도도 깔끔하게 하고 넥타이도 옷 빛깔에 마춰 매고

부르르릉 차를 몰고 팰리세이즈 파크웨이를 달릴 거라구.

 

이른 아침 밖에 싸락눈이 희미하게 쌓였어. 사랑을 시작할 때 상대의 눈치를 살피 듯

섬세하고 미약한 의지로 자기 심중을 보이 듯 엊그제 떨어진 낙엽 위에

그렇게 백설기 같은 싸락눈이 슬쩍슬쩍 쌓였다.

 

근데 이것 봐. 서재 밖 썰렁한 나목들 사이로 웬놈의 야생 칠면조 세 마리가

비무장지대를 파고드는 무장간첩들처럼 살금살금 탐색하고 있는 거 있지.

이건 그래서 얼른 창문을 열고 찰칵찰칵 디카로 찍은 사진들이야. 저것들이 내가

자기네 동족을 칼로 석석 쓸어서 먹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이 사람은 안전한 사람이다,

싶어서 방문을 한 거라니까. 내 자폐증의 마지막을 현란하면서도 아주

그로테스크하게 장식해 주기 위하여 잠깐 들린 거 같아. 그리고 바삐 자기들 갈길을 가네.

안녕, 사랑하는 내 겨울 칠면도들이여... 히히.

 

© 서 량 2008.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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