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7

그늘의 색깔 / 김정기

그늘의 색깔 김정기 오랫동안 그늘에 있다 보니 그늘에도 색깔이 보인다 되도록 노오란 그늘에 머물러 했지만 언제나 바탕은 진회색이었다 검은 바위가 들어앉은 듯 무거웠지만 가는 손가락을 펴 뒤집으니 밑둥에는 아지랑이가 묻어 있었다 반짝이는 진흙 가루로 얼굴을 치장하니 고향집 우물에 나르시스가 된다 외로움은 번져오면 색깔이 되는지 장미 가시가 등줄기에 박혀 스스로 그늘을 찢고 숨어 사는 집에 색칠을 한다 © 김정기 2020.03.21

여름 형용사 / 김정기

여름 형용사 김정기 여름 한낮에 움직이는 고요는 한마디 형용사다. 언제나 뒷그림자에 숨은 여린 얼굴도 그늘에 일렁이는 영화 장면이 된다. 멀리 있는 줄 알았던 팔월도 눈앞에 다가서니 벌써 나는 얼마큼 와 있는지. 아까워하던 아침저녁의 노을도 시름시름 가던 날도 정오의 뙤약볕에 뛰어간다. 진작 간수하지 못한 나날도 녹아 흐른다. 헐겁게 빠져나간 외로움까지도 찾을 수 없는 한낮 등을 보인 친구에게 여름을 주려고 손을 내민다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기에 더 환하고 더 부드러운 것이 없기에 맞바람 치는 창가에서 자판을 두드리며 바람에 실려 오는 풋내 여기서 모두 정지하기를 거둘 것이 아직 있으면 나누기를 지금 땅 밑에도 여름볕 밝게 드리워 주황색깔 나리 꽃잎 지는 여름 형용사 © 김정기 2015.07.19

강물의 사서함 / 김정기

강물의 사서함 김정기 강물이 풀리면 봄이 온다네 샛강이 나은 수많은 바람들이 목을 축이며 찰랑이는 물결 위에 눕네 아무 말이 없어도 몸은 풀리고 허물어지는 살결에 새겨진 이름 석자 달려오면서도 일그러지지 않은 문패를 곳곳에 달고 잊어버린 주소 앞에 흘러가네. 강기슭에 부대껴 깨어진 물방울끼리 모여 독한 그리움으로 엉겨 붙고 손 놓아준 강물에게 소식을 물어보네. 어디쯤 모래벌에 웅덩이를 파고 함께 흐르지 못하는 외로움도 묻어두고 뒤에 오는 물결에서 번지수를 찾는 봄 편지. © 김정기 2014.02.15

이끼 낀 돌 / 김정기

이끼 낀 돌 김정기 속 깊이 자라고 있는 멍 자국을 만져가며 푸른 것은 푸른 것끼리 덧나서 이끼 입고 있는 돌은 외로움을 만들어 피라미들이 떼 지어 와도 요동치 않는 어금니 앙다물고 두 주먹 움켜쥐었구나.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굴러야 빛난다고. 여름 저녁 빛이 창으로 쳐들어올 때 아직도 홍조 띄우며 황홀해 하고 평생 한 가지만 붙잡고 웅크리고 앉아 반짝이지 못 하였다네. 온몸에 푸른 멍들고도 울지 못 하였다네. © 김정기 2010.09.06

|컬럼| 429. 찹수이

말로 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 에드워드 호퍼(1882~1967) 뉴욕 근교 소도시 나이액(Nyack)에 있는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생가(生家) 박물관을 찾아간다. 나는 호퍼의 그림을 참 좋아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자’라 불리는 그는 생전에 자기가 ‘인상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고 45일이 지난 1942년 1월 21에 완성된 호퍼의 ‘밤샘하는 사람들, Nighthawks’를 음미한다. 일본의 본토 침략에 대비해서 공습훈련이 있던 때다. 썰렁한 다이너에 앉아있는 남녀의 표정이 보는 사람의 상상을 자극한다. 당신도 아마 이 그림을 몇 번 무심코 보았을지 모르지. 구글 검색을 하면 금방 화면에 뜬다. 등장인물들의 마음 속에 나를..

|컬럼| 388. 외로움

며칠 전부터 집 밖 어디선지 간간 꾸르륵, 꾸르륵, 터키 우는 소리가 들린다. 꼭 누구를 부르는 것 같은 소리. 매해 이맘때면 그러려니 하면서도 올해는 유독 크게 들린다. 창밖에 서너 살짜리 어린애 정도 키의 터키가 서성이고 있다. 턱밑 벼슬이 불그스레하다. 그는 집 뒤뜰 아주 가까이에서 내 서재 쪽으로 발길을 재촉하려고 벼르는 모양새다. 나를 정면으로 보면서 가만히 서있기도 하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360도로 사방을 살피면서 약간씩 앞뒤로 흔든다. 사나운 발톱으로 풀섶을 파헤친다. 땅에 날카로운 키스를 퍼붓다가 머리를 천천히 드는 동작이 나를 친구로 삼고 싶은 기색이다. 흡족하게 따뜻하지 못한 봄바람 속에서 터키 한 마리가 내 뒤뜰을 노닐고 있다. 많이 외로워 보인다. 어릴 적 하모니카를 배울 때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