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8

두번 째 가을 / 김정기

두번 째 가을 김정기 손바닥 실금에서 피가 흘러요 그 줄기가 가을꽃으로 피어 따뜻하게 집안을 덮어도 안개가 안개를 몰아내는 길 돌아가는 길은 멀고 아득해요 죽지 않는 나무들이 몰려와 둑을 막아도 가을은 벌써 봇물로 쏟아져 들어와서 무릎 위를 차오르고 있어요. 두 손에 받든 하루의 무게를 공손하게 맑고 아름다웠던 당신에게 드려요. 손바닥 굵은 금에서 강이 흘러요 이 강은 소리 없는 곳으로 흘러가 가을 억새밭에 당도한대요. 천만가지 빛깔이 어우러진 보기만 하여도 기절할 것 같은 이 가을날이 이제 조금, 아주 조금 눈에 보여요. © 김정기 2010.11.02

분청사기 / 김종란

분청사기 김종란 깨뜨려져 흩어지는 소리 소리 소리는 떠나고 먼 옛날 꽃잎 지듯 깜깜하게 물레는 돌고 일필휘지의 손짓, 모란 연옥의 불꽃 머금어 아련히 희다 아니 불에 타 검다 새는 오롯이 오리무중을 걷지 담담하게 휘어짐을 새겨보는 덩굴 그리고 눈 크게 뜬 말 없는 물고기 안개가 머무는 하늘 눈 내리는 하늘은 몸으로 두르고 소리 없는 기척으로 마주 보지 않는 눈빛으로 다시 빚어지는 불의 추상, 미래 © 김종란 2011.07.26

꽃으로의 기행, 금문교 / 김종란

꽃으로의 기행, 금문교 김종란 누군가가 수 없는 누군가가 삶과 죽음을 던지면서 금문교 여기 사람 하나 오롯이 서 있듯 금빛 길 발끝에서 머리까지 들어온 금문교를 종단하다 아득하다 이제 머리에서 발끝으로 난 금문교를 걷다 안개가 수시로 감싸는 Golden Bridge 샌프란시스코는 검은 벚꽃나무 둥치 캄캄하고 암울하게 버티다가 꽃안개 인다 세어 볼수 없는 꽃 함박웃음 눈물 범벅이 된다 몇 권의 책과 그림과 음악을 묻는다 드러나며 감추는 삶의 안개 속 꽃으로의 기행 맑고 투명한 자멸의 열기 안개가 인다 송이 송이로 무수히 녹슬어 암담해 감당할 수 없어 꽃이 핀다 송이는 기울어진다 안개가 바람에 밀리듯 서늘한 입맞춤을 주고 받는다 © 김종란 2011.04.11

|詩| 우유와 안개의 병치법

우유, 그것도 분말 우유 맛으로 치면 어찌 모유에 비길 수 있으랴마는 젖빛, 우유빛으로 어느 날 내 눈앞을 가리는 안개가 있었지. 그건 흔하지 않은 일이었어 꿈 속에서 꾸는 또 하나의 꿈처럼 검붉은 장미꽃닢이 겹겹이 겹치마 흉내를 내면서 내 감각을 둔탁하게 만들어 주는 엄숙한 예식이었다 의식이 탁해지면 탁해질 수록 정신이 초롱초롱해졌어 그건 정말 흔하지 않은 일이었지 만약에 빛에 생명이 있었다면 반짝 발광(發光)하는 젖빛, 안개빛의 눅눅한 습기가 내 폐 속으로 흠씬 젖어들던 그 순간 같은 경우는 © 서 량 2009.10.19

2009.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