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32

|컬럼| 435. 우리가 원하는 것들

병동 직원들에게 환자들과 우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직원들은 별로 공감하지 않는 눈치다. 상상해 보라.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외과의사처럼 정신과의사가 자신이라는 주체와 환자라는 객체를 완전 별개로 취급하는 정경을. 정신과에서는 주체와 객체사이에 간극이 심하면 치료가 힘들어진다. 나나 환자나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우는 똑같은 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우울한 감정에 휩싸여 있는 환자를 대할 때 함부로 웃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한 수사학의 3대요소를 생각한다. 에토스(Ethos, 도덕). 로고스(Logos, 논리). 파토스(Pathos, 감성). 그는 이 셋을 잘 운용하면 대중을 설득시키는 훌륭한 웅변이 된다고 가르쳤다. 셋 중에서 제일 강력한 것은 파토스. 고린도 전서 13장 13절에 나오..

|詩| 수제비구름

이제 와서 당신을 애틋하게 익힐 수 있다니 나보다 어린 나이 내 옛날 부모도 희뿌연 어항 속 금붕어도 무궁한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망설임 끝에 누구나 과거를 등지고 돌아서는 거래요 네모 반듯한 제사상에 기우뚱 세워진 할아버지 사진이 허상이었어 여름방학 키 큰 노적가리 시골 할머니 집 부엌에서 내게 꼬리치며 달려들던 강아지도 허상 트럭 운전사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지구 반대편에서 내 쪽으로 다가온다 트럭은 거대해 우주의 운동신경도 허접한 동영상일 뿐 지저분하게 흩어지는 수제비 물방울 겹치듯 포개지는 사랑 산마루 언저리로 둥둥 뜨는 수제비구름도 거대해 어머, 영원한 아침은 징그러워 나는 확고한 하늘빛으로 얼어붙는다 당신을 향한 거대한 그리움에서 © 서 량 2011.03.16 – 2021.07.04

2021.07.04

|詩| 사과를 위한 터무니없는 변명

사과를 탓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일일 거다 한입 맛본 후 덤벼들어 더 깨물어 먹고 싶은 새빨간 사과가 자타가 공인하는 내 삶의 과녁일망정// 사과는 내 무모한 사랑을 독차지한다// 황망한 시련의 끝머리에서 사과가 세차게 흔들린다 미련을 버려라 미련을 버리거라// 나는 사과를 욕보인다 앞뒤관계가 맞지 않는 순간에 설익은 논리의 틀을 홀랑 벗어 던지고 전혀 예기치 못한 자세를 취하면서 톡톡히 반항을 할지언정 © 서 량 2011.06.12 – 2021.04.08

2021.04.08

|詩| 맨해튼 봄바람

봄바람 부는 날 쪽배에 탄 채 강물에 떠내려 갔지요 물결도 내 몸도 내내 가벼웠어요 둥둥 떠내려 갔지요 맨해튼은 가벼운 섬입니다 맨해튼은 생김새가 꼭 고구마 생김새예요 맨해튼을 드나드는 사람들도 모두 얼굴이 고구마 모양이잖아요 자세히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바람이 목 언저리를 자꾸 파고드는 날 당신과 내가 수소, 산소, 질소, 탄소가 되어 하늘에 둥실둥실 떠다닙니다 맨해튼을 사랑하기 때문인가요 봄바람이 연거푸 불어오는 날이면 © 서 량 2008.04.14 - 2021.03.29

2021.03.29

|컬럼| 262. 사랑과 공격

뉴욕 코넬 의과대학의 오토 컨버그(Otto Kernberg: 1928~) 밑에서 정신과 수련의 과정을 밟은 것은 내 직업 인생에 있어서 1970년대 중반에 터진 커다란 행운이었다. 현재 컨버그는 성격장애(Personality Disorder)의 진단과 치료 분야에서 세계 제일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그는 우리 시대에 점차로 쇠잔하는 정신분석학에서 내가 존경하는 마지막 자이언트다. 체질적으로 언어에 지독한 관심을 품은 나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약이나 수술보다 말을 사용하는 기법에 심하게 심취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이란 상대의 마음을 보듬어 파고드는 행위이면서 사람이 사람에게 심리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고도의 기술과 경험을 요구한다. 마음이 마음을 치료한다는..

|Poem| Riposte

Riposte (1917) --William Carlos Williams Love is like water or the air my townspeople; it cleanses, and dissipates evil gases. It is like poetry too and for the same reasons. Love is so precious my townspeople that if I were you I would have it under lock and key--- like the air or the Atlantic or like poetry! 반론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즈 사랑은 물이나 공기 같습니다 동네사람들이여; 사랑은 씻어내고, 사악한 공기를 없애줍니다. 사랑은 또 같은 이유로 시와도 같..

|컬럼| 342. 사랑을 할까, 생각을 할까

분노 조절을 남들처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라이언은 눈이 가을 하늘같이 짙푸른 30 중반의 백인 남자다. 민감한 발육 시기를 고아원에서 보낸 그는 걸핏하면 남과 싸우거나 말썽을 부리면서 오랜 세월을 정신병원에서 살아온 성격장애 환자다. 병동 직원들 거의 모두가 그를 싫어하는 눈치지만 나는 두뇌가 총명한 그를 좀 좋아하는 편이다. 세션이 끝나면 자꾸 “I love you, Doctor!” 하는 그에게 나는 으레 “Don’t love me. Think about what I said!” 한다. 그는 아직 왜 내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깊이 생각해 볼만큼 심리상담에 대한 관심이 없다. 라이언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서 자랐다는 이유로 지금 부모 역할을 해주는 정신과의사에게서 긍정적인 관심을 받고 싶어서 안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