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21

|詩| 빛이 없는 자리 2

빛이 없는 자리 2 빛이 함몰한 곳에 가보았다 세차게 끓어오르는 magnetic force 네 귀가 번쩍 들려 거무죽죽한 기와지붕 세찬 바람이 날개뼈를 흔드네 당신의 푹 꺼진 눈등 반듯한 이마 memory 빛이 내뿜는 nostalgia 등등 스며드는 적요가 좋았다 詩作 노트: 詩를 쓰다 말고 별안간 방의 불을 확 끈다 창밖 하늘 빛이 거무튀튀한 기와지붕이네 © 서 량 2011.08.31 – 2024.02.01

2024.02.01

|詩| 아버지의 방패연

아버지의 방패연 아버지가 지금 내 아들보다 더 새파랗게 어린 나이였을 때 나는 철부지 초등학교 2학년이다 아버지와,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내 자식이 얽히고설킨 씨앗이 이어지는 별하늘로 이윽고 불어오는 겨울 바람 아버지가 대나무를 가늘게 잘라서 내 앞에서 방패연을 만드신다, 창호지에 창호지에 달라붙은 대나무 뾰족뾰족한 잔뼈, 잔뼈 연을 띄운다 등골 시린 지구 끄트머리에서 연신 요동질 치는 연줄, 가느다란 실 그러나 어느새 실이 끊어져, 툭 끊어져 옆집 마당 감나무 가지에 내려앉아, 사뭇 바람결에 흔들리는 반투명 젖빛 창호지 내 아버지의 사각형 방패연 시작 노트: 유년기의 향수심이 트라우마를 능가하는 것 같다. 힘겨운 기억을 솎아낸 과거는 아름다운 과거로 변천한다. 지금도 겨울 하늘에 점잖게 군림하던 아버..

발표된 詩 2023.03.01

새벽 소리 / 김종란

새벽 소리 김종란 새벽 공기를 뚫고 아침으로 날아드는 새들의 떼창 속 깊은 악기 소리, 새벽은 내 영혼의 포도주 폐부를 적시는 맑은 바람을 타고 먼 옛날 음악시간 풍금 소리 들린다 분홍과 연두 빛이 오는 소리 검푸른 숲을 빠져나와 내게로 오는 아코디언 소리 은은히 들리네 열리는 듯 그러나 닫히는 듯 바람의 분량만큼 내 옷섶을 파고드네 © 김종란 2021.08.05

나무를 베는 사람 / 김정기

나무를 베는 사람 김정기 날마다 나무가 쓸어진다 날카로운 전기톱에 소리도 못 지르고 쓸어진다 가끔 물위에 떠오르는 나무 가지를 건지며 그가 물 속에서도 톱질하고 있음을 알았다 오래도록 나무를 베면서 나무냄새 외에는 맡지 못해도 그는 언제나 고요하고 환하다 아주까리 꽃대궁이 솟아 오르던 날 저녁 나무들은 모조리 베어지고 톱밥이 온통 마을을 덮는데 그는 여전히 빛나는 톱을 들고 유유히 걸어가고 있다 나무를 벤 자리에 새 움이 돋고 숲을 이루어도 그 사람은 계속 나무를 벤다 멀리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푸르다 그는 나무다 가까이서 보는 그는 날선 톱이다 오늘도 바람으로 나르며 나무를 벤다 © 김정기 2010.05.17

백 년 전 / 김정기

100년 전 김정기 100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을 삭이기에 충분한 고요인가 이 건물에 가득하던 풋풋함 모두 어디로 갔을까 헤픈 웃음도 문안에서 졸아들고 여자의 허리에 매달리던 굵은 목소리 공중분해 되고 바람도 서로 껴안던 진주 목거리 풀어져 흩어져서 떨고 있다. 나뭇잎이 내려앉은 스카프에 낡은 실밥 하나 방에 성에 끼던 견뎌내기 어려운 추위 연필로 베껴 쓰던 연서는 세상의 창문을 모조리 닫아걸었지 어두움은 온몸을 덮쳐왔지만 손끝에 닿는 씨앗들 공중에서 떨어지는 빛으로 옷을 지어 입고 길 떠나던 백 년 전 어느 날 한 사람의 세월을 몰래 본다. © 김정기 2012.12.13

바람모자 / 김정기

바람모자 김정기 남빛 바람모자 쓰면 겨울하늘을 나를 수 있네 잔가지 쳐버린 우리 집 나무들 틈을 비집고 탱탱하게 부은 구름 떼 속으로 솟아올라서 끝내 사라질 것들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바람의 손을 잡겠네 만질 수 없는 모자챙에 꽃을 달고 비도 눈보라도 뙤약볕도 막아버리고 세상에서 도달하지 못한 나라에서 곤히 잠이 들겠네 바람에 몸을 매달고 먼 곳으로 떠나서 그 빛나는 우주의 맨살을 만나 얽히고 설킨 이야기 풀겠네. © 김정기 2010.11.30

|詩| 인터넷에 잡히는 꽃

솜구름 떠도는 화면 속 거무칙칙한 바위 틈에 자리잡은 *벌레잡이제비꽃, 초록색 바람에 붙잡힌 벌레잡이제비꽃이 다섯 손가락을 펼친다 진한 보랏빛 요술을 부리는 벌레잡이제비꽃, 전자파장 자욱한 인터넷에 새빨간 점박이 무당벌레 한 마리 기어간다 잠시 후 눈물을 펑펑 쏟는 벌레잡이제비꽃, 초록색 바람결에 짙은 안개가 깔리는 전자공간에 투사되는 당신의 심층심리 *Pinguicula vulgaris: 대한민국 북부 높은 산의 습한 바위나 늪지에 나는 여러해살이 식충 식물 시작 노트: 내 삶을 지배하는 인터넷. 어떤 때는 종일토록 인터넷을 쏘다닌다. 우연찮게 벌레잡이제비꽃을 공부한다. 동물을 잡아먹는 식물이라니! 말만 듣던 그런. © 서 량 2009.04.14 – 2022.12.15

2022.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