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기 5

물감옥 / 김정기

물감옥 김정기 물속을 걷는다 집안에서도 어디를 가도 물 컴퓨터 앞에 앉아도 물이다 헤엄도 못 치면서 물에서 살다니 걷어내야 할 거품도 껴안고 헐벗은 말들만 뛰노는 광장에서 하루해를 적신다 허둥지둥 달려온 길만 햇볕을 쬐고 아득한 것들만 모여 사는 동네에 아직도 낯설기만 한 물감옥의 주소를 쓴다 어디 까지가 물길이고 바람 길인지 분간 못하는 지점에 와 있구나 물결이 바람이 되어 밀어 닥쳐도 여기는 따뜻하고 온화하다 어둠의 척도도 잴 수 없는 물 속 그래도 당신은 여기까지 따라와 내 등에 물기를 닦아주고 있다 언제까지 물 안에서 대답하지 못하는 세월의 등마루에서 조금씩 잠들어가고 있는 의식세계에 연두 풀잎 한 잎 눈앞에 자란다 © 김정기 2018.08.21

침향(沈香) / 김종란

침향(沈香) 김종란 어두워진 후의 시간 눈을 감고 향을 찾는다 어두움 속으로 떠날 배낭을 꾸린다 익숙한 향 기도서 사진첩을 뒤적인다 향로(香路)를 찾는다 오래된 마음이 울지 않게 꽃처럼 부드럽게 자라고 있는 생각나무 숲을 낮게 비행하며 여리게 반짝이는 가장 오래된 눈물을 바라본다 침향(沈香) 잃었던 길 숨을 멈춘다 날개를 퍼덕이면서 일탈한다 물기 머금은 뜻 잠시 내려놓아 심해어처럼 다가 가 순이 움트던 어둠도 향기로운 새로운 소식으로 묻는다 © 김종란 2012.02.05

진양조의 공간 / 김종란

진양조의 공간 김종란 당신은 가두지 않겠어요 바람 부는 곳 눈 내리는 곳 낙엽 지는 곳에 있어요 지켜 보고 있어요 비인 곳 까마득한 산불 일어 미세하게 느리게 침묵하는 것들은 함께 흔들리어 늦은 볕 아래 투명하게 불 붙다가 텅 비어져요 산뜻하게 베어져 이 빈터에 놓이네요 잠시 눈시울에 머뭇거리다 흘리지 못해 반짝 빛나다 별빛 아래 물기 듬뿍 머금은 흰 국화(菊花) 사라지는 것을 은유(隱唯)하며 이 비인 곳을 지나네요 *국악의 가장 느린 장단 © 김종란 2009.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