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7

회색 세상 / 김정기

회색 세상 김정기 가끔 물감은 펑펑 쓸어져 몸에 달라붙는다. 회색에 점령당한 채 세상의 색깔은 없어져 오히려 단아하다 청동색 파리 몇 마리 잡고 여름을 떠나보내며 그 색조가 지워지는 떨림을 듣고 새 계절의 만남이 저리고 저리다. 시간이 걷어 간 색채를 돌려받으려 손가락을 펴 회색 그림자를 모조리 지우고 여자는 날마다 새로운 무지개를 그린다. 일곱 가지 빛깔은 계속 회색에게 침범 당해도 털실로 모자 떠서 쓴 랩 가수의 음정처럼 계속 세상은 채색된다. 칠해도 칠해도 세상은 아직 회색 그래도 단풍에 뒤덮여 끝없이 달려갈 회색 세상 © 김정기 2013.08.29

|컬럼| 401. 따스한 가을

티. 이. 흄(T. E. Hulme: 1883~1917)의 짧은 시 “가을”(1908) 전문을 소개한다. 약간 차가운 가을 밤에/ 시골 길을 걸었네/ 그리고 얼굴이 벌건 농사꾼 같은/ 불그레한 달이 울타리 너머 몸을 구부리는 걸 보았네/ 나는 멈춰 서서 말하지 않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네/ 그리고 주변에는 동네 아이들처럼 얼굴이 하얀/ 생각에 잠긴 별들이 있었다네 시에 있어서 흄은 낭만과 고전에서 모더니즘으로 넘어오는 이미지즘(imagism)을 이룩한 창시자로 손꼽힌다. 말 수와 수식어를 최소한으로 줄여 말하는 이미지즘 기법은 시 뿐만 아니라 껍데기를 벗겨 놓은 언어의 누드(nude) 데상 같다. 이미지즘은 로코코 스타일의 은유와 상징에 익숙한 예술 비평가들에게는 데면데면하게 느껴지는 시작법이다. 햇볕에 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