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동 환자들이 처음에 장난으로 싸우다가 나중에 정말로 치고 박고 싸우기를 잘한다. ‘play fighting, 장난 싸움’이 ‘real fighting, 정말 싸움’으로 변하는 것이다.
왜 누가 먼저 장난 싸움을 시작했냐고 물어봐도 그럴 듯한 답이 안 나온다. 질문 자체가 큰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다. 무료한 병동생활에 저항하기 위하여 둘이 장난 싸움을 무의식적으로 공모한 것이 분명하다.
사자, 개, 쥐, 코끼리, 원숭이 같은 네발짐승 뿐만 아니라 앵무새, 병아리 같은 조류도 장난 싸움을 한다. 장난 싸움으로 심신을 연마하다가 사냥과 자기방어와 가족보호를 위한 공격성을 차후에 십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장난은 한자어 작란(作亂)에서 유래했다. ‘작란’이 소리 나는 대로 ‘장난’으로 변한 것이다. 문자 그대로 ‘난리를 일으키다’라는 뜻. ‘장난’은 사전에 ➀주로 어린이들이 재미 또는 심심풀이 삼아 하는 짓 ➁짓궂게 다른 사람을 놀리는 못된 짓을 함,이라 풀이한다.
장난의 ➁번째 의미는 성희롱(性戱弄), 할 때처럼 남을 괴롭히는 행동이다. 나훈아의 옛날 히트곡, ‘사랑은 장난이 아니랍니다’의 구성진 하소연이 귀에 들리는 듯한 대목이다. 장난이라는 말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엄청난 양면성을 감추고 있다.
우리는 왜 남을 놀리는가.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의도인가. 상대가 쑥스러워하는 게 재미있어서인가. 왜 우리는 남의 미흡함을 돋보이게 하고 남을 깔보면서 기뻐하는가. 그런 우리의 잔인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놀리는 사람과 놀림을 당하는 사람 사이에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잔잔한 공모의 물결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영화에서 개구쟁이 미남 주연이 상대 여배우를 짓궂게 놀렸을 때 그녀가 눈을 곱게 흘기면서 고혹적 미소를 흘리는 장면은 어떤가. 장난싸움이 있듯 장난학대증이며 장난피학대증도 있다는 말인가.
있다. 인간의 본성과 본능에 학대증과 피학대증의 씨앗이 숨어있다. 지배의식과 굴복의지가 좋은 조화를 이루면서 가정과 직장과 국가의 균형이 순조로이 유지된다. 지도자와 추종자의 화음과 불협화음의 오묘한 맺고 풀림이 진행된다. 이 절차가 산산조각이 났을 때 치료가 힘든 정신질환이나 악랄한 범죄행각이 발생한다.
가학피학증, ‘sadomasochism’은 더는 공포영화의 테마가 아니다. 변태성욕이라는 좁은 의미 또한 이미 죽은지 오래다. 우리말로도 원어 그대로 발음하는 ‘사도마조히즘’은 우리 사회와 생활의 일부가 되어 당신과 나 사이에 유유히 작동한다. 그것은 어린 포유동물과 조류의 장난싸움, 그리고 놀리고 놀림 당하는 인간의 상호작용에서 발화(發花) 또는 발화(發火)한다.
사디즘은 18세기 말 프랑스 백작 사드의 이름에서 1888년에 생겨난 성도착증의 일종이었는데 지금은 ‘love of cruelty, 잔인성 사랑’이라는 의미로 널리 통용된다. 마조히즘은 성적학대를 받는 즐거움에 대한 소설을 쓴 동시대 오스트리아 작가의 이름을 1892년에 따온 피가학증을 일컫는 단어. 19세기 말을 장식한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성적이거나 심리상태에 관계없이 그때부터 지금껏 늘상 다정하게 동행하고 있다.
사람이라는 두발 짐승과 허두에 열거한 네발짐승들과 조류는 명실공히 장난 싸움 시기를 거쳐서 개체보존과 종족보존을 위한 본능의 성숙기에 이른다. 그러나 당신과 나 같은 호모 사피엔스가 부끄러워 할 사항이 하나 있다. 그것은 즉 우리는 다른 동물과 달리 걸핏하면 장난 싸움이 정말 싸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 서 량 2022.03.20
-- 뉴욕 중앙일보 2022년 3월 23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22/03/22/society/opinion/2022032217175479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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