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98. 실실 쪼개기

서 량 2021. 9. 20. 09:41

 

제임스가 병동 복도에 서있다가 느닷없이 으흐흐 하며 크게 웃는다. 징글맞고 꺼림칙한 웃음 소리! 아무리 정신질환이지만 이건 좀 심하다.

 

으흐흐라는 의성어는 영어에 없다. ‘ha ha’가 있고, 산타클로스의 웃음소리인 ‘ho ho ho’가 있을 뿐이다. 하하, 허허, 헤헤, 호호, 후후, 히히, 킬킬, 껄껄, 낄낄, 푸하하, 으흐흐, 으하하, 이히히, 큭큭, 킥킥, 그리고 인터넷 채팅방에 굴러다니는 ‘ㅎㅎ’, ‘ㅋㅋ’ 같은 다채로운 우리말 앞에서 영어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동물 신경과학자, 야크 팽크셉(Jaak Panksepp: 1943~2017)은 2003년에 실험실 쥐의 배를 간질이면 쥐가 크게 웃는다는 사실을 녹음으로 증명했다. 동물도 소리내어 웃는다. 원숭이, 돌고래, 고양이, 개도 당신과 나처럼 웃는다. 지나가는 개가 웃는다는 우리말이 빈말이 아니라니까.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Cheshire cat, 체셔 고양이’는 늘 웃는다. 좀 어려운 표현이기는 하지만, ‘grin like a Cheshire cat’는 ‘공연히 히죽히죽 웃다’라는 뜻이다.

 

웃는 방법에는 히죽히죽 외에도 많이 있다. 크게 드러내지 않고 살며시 혼자 웃을 때는 ‘배실배실’, 눈과 입을 슬며시 움직이며 정답고 환하게 웃으면 ‘싱글벙글’, 입을 좀 크게 벌리며 가볍고 부드럽게 슬쩍슬쩍 잇따라 웃는 모양의 ‘벙싯벙싯’, 입술을 힘없이 터뜨리며 자꾸 싱겁게 웃을 때의 소리 또는 모양의 ‘피식피식’, 등등.

 

영어는 어떤가. 보편적인 웃음 ‘laugh’, 소리 안 나게 웃는 ‘smile’, 활짝 웃는 ‘grin’, 킬킬대는 ‘giggle’, 키득거리는 ‘cackle’, 껄껄대는 ‘chuckle’, 깔깔거리는 ‘chortle’,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는 초콜릿, ‘Snickers’의 뜻은 ‘숨죽여 낄낄대는 웃음’이다. 신조어 슬랭으로 ‘snicker-snack’은 낄낄거리며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간식이라는 뜻.

 

우리말은? 너털웃음, 선웃음, 억지웃음, 헛웃음, 너스레웃음, 코웃음, 눈웃음, 함박웃음, 쓴웃음, 겉웃음, 반웃음, 까투리웃음, 비웃음, 등등. 게다가 깡패식 거친 표현으로 ‘실실 쪼개다’가 있다. 실실 웃으면서 상대의 반감을 은근히 불러일으키는 도전적인 태도!  

 

웃음에 대한 사자성어도 있다. 큰 소리로 껄껄대는 가가대소, 박수를 치며 크게 웃는 박장대소, 얼굴을 펴면서 크게 웃는 파안대소,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는 앙천대소. 워낙 중국인들이 대국인지라 웃음소리도 좀 큰 모양이지.

 

어원학을 기웃거리다가 단어에 깃든 인간의 본성을 깨달으면서 종종 어두운 미소를 짓기도 한다. ‘laughter’의 어원이 마침 또 그렇다. 이 말은 워낙 14세기 고대영어에서 ‘기뻐하며 웃다’와 ‘비웃다’라는 두 가지의 뜻이 있었다.

 

서구인들은 남을 조롱하면서 유쾌하게 웃었다는 해석이 너끈히 내려진다. 우리도 꼭 마찬가지다. ‘laugh at somebody’는 누구를 비웃는다는 의미.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I am not laughing AT you. I am laughing WITH you.” - “당신을 비웃지 않아요. 당신과 함께 웃지요.”

 

대한민국을 웃음의 도가니로 만들었던 희대의 코미디언 서영춘(1928~1986)이 떠오른다. 그의 웃음 소리는 우리 역사에 남은 불멸의 웃음이었다. 나는 이제 웃음에 관한 논설을 접고 소리내어 웃는다. “가갈갈갈…”

 

© 서 량 2021.09.19

-- 뉴욕 중앙일보 2021년 9월 22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9738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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