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말을 잘하는 환자의 차트를 정리한다. 그의 말습관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고 잠시 망설인다. ‘foul-mouthed, 입버릇이 더러운’? 말이 깨끗한지 더러운지 하는 판단을 누가 내리나. 내가 과연 언어의 청결과 불결을 판가름하는 사회적 규범의 척도라는 말인가.
환자가 욕설, 저주라는 뜻으로 ‘swear word’를 자주 쓴다고 할까. 화가 나서 ‘내뱉듯이 하는 욕설’이라는 의미의 격식 있는 표현, ‘expletive’는 어떨까. 더 위엄이 넘치는 ‘profane(신성 모독적인, 불경스러운, 욕설적인)’이라는 단어는?
‘profane’은 원래 라틴어에서 ‘out of temple, 사원 밖’이라는 의미였다. 즉, 사원 안에서 쓰는 말은 성스러운 말이면서 사원 밖의 말은 욕설이라는 뜻이 된다. 엘리트주의, ‘elitism’, 이른 바 ‘선민의식’으로 도배를 한 말이다.
선민의식은 우리말에서도 눈에 띈다. 문외한(門外漢)은 어떤 일에 전문적 지식이나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 서구적 의식구조의 ‘사원 밖’이나 우리 사고방식의 ‘문밖’이나 똑같이 옥외(屋外, outdoors, 야인)라는 뜻을 지닌다. 자고로 지체가 높은 사람은 실내에 있고, 낮은 사람들은 밭이나 들에서 일을 하나니.
희랍시대의 엘리트주의는 또 이렇다. 바보, 멍청이, 천치라는 뜻의 ‘idiot’는 본래 ‘평민’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귀족에 반하여 평민은 교육을 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평민=바보천치’라는 등식이 말속에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같은 말뿌리로 ‘idiom’은 관용어라는 뜻이니까 즉, 일상어는 멍청이들이 쓰는 말이다.
우리말에서도 한문(漢文)은 유식한 선비들의 전용물! 언문(諺文)은 속된 사람들이 쓰는 품격 없고 저속한 말이다. 사대부 자손들은 한문을 썼지만 세종대왕의 한글, 즉 상인(常人, 일상인, ordinary people, 상놈, 쌍놈)들이 쉽게 깨우쳐 쓰는 글은 언문이라 불렀다. 나는 체질적으로 한자어보다 순수한 우리말을 좋아한다. 한자어는 어딘지 위선적이고 위압적인 데가 있다.
사람은 식물이나 광물이 아닌 동물계에 속한다. 그 중에서도 포유류, 젖먹이동물. 다른 네발짐승과 조금도 다름없이 어린애 때 엉금엉금 기어 다닌다. 기타 다른 동물적 특징이 합쳐져서 호모사피엔스라는 종족(種族)을 번식시키는 것이다.
불교용어 중생(衆生)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리고 ‘짐승’이라는 말이 중생에서 유래했다는 국립국어연구원의 어원해설을 곱씹는다. 15세기부터 한자어인 ‘중생’을 그대로 표기하면서 처음에는 ‘생물’이라는 뜻이었다가 나중에 네발 달린 동물을 가리켰다는 설명이다. 내 어린 시절 할머니는 짐승을 ‘즘생’이라 하셨다.
불교에서는 수행자와 중생으로 사람을 구분한다. 나도 당신도 중생에 속한다. 어원학 차원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짐승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생의 중(衆)을 한자사전은 ‘무리 중’이라 풀이한다. 출중(出衆)하다는 말은 여러 사람 가운데서 특별히 두드러지다는 뜻. 출중한 사람은 무리를 벗어난 사람이다.
출가(出家)는 세속의 인연을 버리고 성자(聖者)의 수행생활에 들어간다는 의미다. 처녀가 시집가는 것도 출가라고 하지. 가출(家出)은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가는 행동이다. 싯다르타의 출가나, 처녀의 출가나, 비행 청소년의 가출이나, 다 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모험적인 행동이다.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가정인 국가를 버리고 이곳 미국에 이민 온 당신도 나도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 서 량 2021.09.06
-- 뉴욕 중앙일보 2021년 9월 8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970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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