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91. 고흐를 동정하다

서 량 2021. 6. 14. 11:30

 

-- There is peace even in the storm. (Van Gogh) – 평온은 심지어 폭풍 속에도 있다 (고흐)

 

한 미약한 인간은 인정사정없는 폭풍의 괴력을 맞닥뜨리지 못한다. 열악한 현실에서 한 가닥의 평온을 구가하는 향취가 전해지는 고흐(1853~1890)의 짧은 명언을 곱씹는다.

 

폭풍이 거창하고 사나운 객관이라면 평온은 한 개인의 희망사항과 의지가 깃들어진 주관이다. 객관과 주관을 이렇게 갈라놓는 내 의도는 환경이라는 외부상황과 평온이라는 내부상태와의 상호관계를 조명하는데 있다.

 

고흐는 37살의 아까운 나이에 권총 자살로 힘겨운 생을 마감했다. 그의 정신질환에 대하여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의견을 피력한다. 정신분열증, 조울증, 간질, 알코올 중독, 성격장애 같은 굵직굵직한 병명들이 거론된다. 나는 충동장애라는 종목마저 첨가한다.

 

2021년 6월에 맨해튼 허드슨 강 부두에 설치된 전시장에서 “Van Gogh: The Immersive Experience”를 관람했다. 큰 강당 서너 군데에서 고흐의 그림들이 벽 전체를 차지하고 동영상으로 돌아가는 진풍경의 연속이었다. ‘immerse’, ‘빠지다, 몰두하다’는 ‘merge’, ‘합류하다’와 말의 뿌리가 같다. 우리는 예술품에 푹 빠져 몰두하는 동안 예술가와 확연히 합류한다.

 

나중에 집에 와서 2018년 영화 ‘At Eternity’s Gate’를 보았다. 한국에서도 <고흐, 영원의 문에서>로 상연된 그의 전기(傳記)를 주제로 한 내용이다. 사려 깊은 대사가 많이 나온다. 고흐가 신부에게 신이 자기에게 재능을 부여할 때 시대를 잘못 골랐다고 말하는 장면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신부는 그렇다면 그것은 신이 실수를 저지른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고흐가 답하기를 신은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이 인정하게 되는 그런 재능을 자기에게 줬다고 말한다. 예수도 십자가에 못 박힌 한참 후에 사람들에게서 숭배 받았다고 덧붙인다.

 

고흐가 좋아했던 여자들은 있었지만 그를 절절히 추구했던 여자는 없었던 것 같다. 그가 고갱과의 갈등 끝에 자신의 왼쪽 귀를 잘라 손에 들고 찾아간 창녀가 유일한 애인이었지만 피투성이로 절단된 그의 귀를 보는 순간 그녀는 실신한다. 고흐의 터무니없는 천재성에 비하여 고갱은 자애심의 그림자가 재능을 가렸던 인물이다.

 

동네 어린애들이 그에게 돌을 던졌고 주민들은 그가 정신병원에서 퇴원 후 동네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청원서를 냈다. 그는 오로지 그림 그리기에만 전념했던 불우의 천재였다.

 

19세기 말을 기하여 여러 천재들이 인류 문화를 서서히 뒤집어 엎는 시대사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예술가와 학자들이 많았다. 그중 미술 분야에서 기존체제를 깨트리는 발판을 마련한 자이언트는 고흐라는 사실에 모든 학자들이 일제히 입을 모은다.

 

고흐의 초기작품은 홀란드 전통대로 침침하고 절제된 색깔이 대부분이었다. 그가 천재성을 아낌없이 발휘하는 후기에는 뜨겁고 강렬한 색깔이 보는 이들의 시선을 강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그림은 다소곳한 고전의 틀을 깨뜨리고 자신의 소견을 당당하게 묘파하는 예술가의 진면목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아무래도 고흐는 비정상적인 사람이었다. 천재라는 정의 자체가 정상의 범주를 벗어난 사람을 뜻한다. 예술계의 기존질서를 흐트러뜨린 댓가로 주위 현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 충동에 굴복해야 했던 그의 애틋한 해바라기 그림을 보면서 한 예술가의 눈물겨운 생애에 짙은 동정심을 품는다.

 

© 서 량 2021.06.13

뉴욕 중앙일보 2021년 6월 16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9449562 

 

[잠망경] 고흐를 동정하다

- There is peace even in the storm. (Van Gogh)- 평온은 심지어 폭풍 속에도 있다. (고흐) 한 미약한 인간은 인정사정없는 폭풍의 괴력을 맞닥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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