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릴 적 살던 집 담 밖에 우뚝 선 전봇대 꼭대기에서 이상한 소리가 끊임없이 났었는데 어른들은 그것을 '도란스' 소리라 했다. 그것은 강력한 전압을 가정집 수준에 맞게 낮추는 'transformer (변압기)' 소리였는데 그 단어의 첫 부분만 따온 일본식 영어발음이었다.
그 '도란스'가 'transport(옮기다)', 'transit(운송)', 'transition(과도기)' 같은 낱말의 시작 부분이라는 것 또한 한참 뒤에 알았다. 'trans'에는 가로지른다는 동작감 외에도 변화, 변천 같은 추상적인 의미가 숨어있다.
'transport'는 중세 불어와 라틴어에서 무엇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긴다는 뜻이었고 16세기 초에는 '감정에 압도당하다'라는 의미도 생겨났다. '당하다'라는 말이 속수무책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에 긍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싶으면 무엇에 '심취하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리고 'She is in a transport of joy' 하면 그녀가 기뻐서 몸 둘 바를 몰라 한다고 훌륭하게 번역할 수 있다.
물건을 운반한다는 말에 'carry'도 있고 'be carried away'는 흥분해서 넋이 나간다는 뜻이다. 그러니 'I was carried away by her' 할 때는 그녀한테 얼이 빠졌다는 말. 사람의 감정은 자기 의사에 딸린 것이 아니라 어떤 알지 못하는 힘에 끌려가거나 압도당해서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스스로의 마음에 술 취하듯 취하는 등, 심한 경우에는 넋이 빠지는 모양이다.
'in transit'은 운송 중이라는 뜻이라 소포배달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지만, 'in transition'은 한 시기와 다른 시기 사이에 처해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영국의 정신분석가 도날드 위니컷(Donald Winnicott)이 아동심리 발달에 대하여 1950년대 초에 발표한 'transitional object'를 어찌 할까 하다가 '과도기 대상'이라 옮기기로 했다.
나이 서너 살 짜리 어린애들에게 정서적 안정과 위안을 주는 과도기 대상으로는 보안 담요(security blanket) 혹은 곰 인형(teddy bear) 같은 것들이 가장 흔한 예로 손꼽힌다. 그런 물체에 집착하는 아이들의 정서를 '과도기 현상(transitional phenomenon)이라 부르고 그런 심리적 공간을 '과도기 공간(transitional space)'이라 한다.
과도기 현상은 우리가 나와 남의 경계에 대한 분별력이 미숙하던 시절에 'first not-me object', 즉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존재에 저도 모르게 끌리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것은 꿈같은 환각도 엄격한 현실도 아닌 애매하고 일시적인 과정이며 따분하고 재미없는 어른이 되기 위하여 비몽사몽간에 겪는 통과의례다.
어른이 된 후에도 당신과 나는 과도기 대상에 매달린다. 우리가 늘 손에 꽉 거머쥐고 놓을 줄 모르는 스마트폰은 일종의 안전담요다. 또 있다. 보는 이의 눈빛이 금세 달라지는 명품 가방 또한 당신의 내부세계와 외부적 현실을 가로지르는 보안성 물품이다. 그 가방을 어깨에 걸친 사람의 심리상태는 든든하고 편안한 버전으로 얼른 업그레이드 된다. 그 순간 당신은 보잘것없는 내적 상황으로부터 용감히 탈출하여 화려한 과도기 공간으로 입장하는 티켓을 내미는 것이다.
티 에스 엘리엇(T. S. Eliot)은 지적한다. "Poetry is not a turning loose of emotion, but an escape from emotion." -- "시는 감정을 푸는 일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그 아늑한 도피처가 당신과 나의 과도기 공간이다.
© 서 량 2014.12.01
-- 뉴욕중앙일보 2014년 12월 3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3011276
[잠망경] 과도기 현상
옛날 어릴 적 살던 집 담 밖에 우뚝 선 전봇대 꼭대기에서 이상한 소리가 끊임없이 났었는데 어른들은 그것을 '도란스' 소리라 했다. 그것은 강력한 전압을 가정집 수준에 맞게 낮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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