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89. 신(神)들의 논쟁

서 량 2021. 5. 17. 10:38

 

브루스가 내게 말한다. “나는 당신이 어떤 정신과의사인지 모르기 때문에 당신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내가 신에게 몇 번을 직접 물어봤는데 당신이 처방하는 정신과 약은 백해무익이니까 절대로 먹지 말라 하더라.”

 

그는 얼마 전 다른 병동에서 내 병동으로 후송된 60대 중반의 백인남자다. 말의 앞뒤관계가 크게 어긋나지 않아서 어느 정도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내가 속으로 고맙게 생각하는 관계다. 요컨대 그와 나 사이에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이나 의견교환은 정상인을 자처하는 당신과 내 대화의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음을 느슨하게 먹고 물어본다. “나는 나 대로 신봉하는 신이 있다. 난처하게도 내 신은 브루스라는 환자를 잘 보살피고 약 처방도 최선으로 잘 하라고 당부하더라. 너의 신과 나의 신이 의견을 달리하는 것 같은데, 이 난국을 해결하는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리고서 두 신이 토론이나 논쟁이라도 벌여야 하는 건가? 하며 나도 모르게  혼잣말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언성을 높이면서 나라는 정신과의사의 신은 자기 신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대답인즉슨 자기 신이 내 신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란다. -- “My God is stronger than yours. He is more powerful!” -- 그렇구나. 신들도 대결을 해서 이기는 신이 있고 지는 신이 있겠구나.

 

그날은 대충 그런 식으로 대화의 끝을 흐리멍덩하게 맺어 놓았다. 그러나 브루스는 연일 계속해서 약을 중단하지 않고 간호사가 주는 대로 꼬박꼬박 복용하는 것이 아닌가. 이상도 해라. 왜 약을 안 먹겠다 해놓고서 먹느냐고 함부로 시비를 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며칠 후 하나의 깨달음이 있었다. 나의 신을 파워가 부족한 신으로 규정짓는 바람에 브루스가 자기 신 말고 다른 신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흑백논리에 푹 빠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유일신의 맹렬한 추종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열등한 신도 월등한 신처럼 엄연히 존재한다. 둘이 대등하면 좋으련만.

 

요사이 잠은 잘 자냐고 물어봤다. 그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이 내린 처방약을 구독하기로 결정 했어! – I decided to subscribe to the medications you prescribed!” -- 움찔한다. 그는 왜 단순하게 ‘I decided to TAKE… ’ 하지 않고 ‘’subscribe"라는 유식한 단어를 썼을까.

 

이유는 어원학에 있다. ‘submarine, 잠수함’, ‘submission, 복종’에서처럼 라틴어 ‘sub-‘는 ‘아래, 밑’이라는 뜻. 그가 내 처방에 굴복한 것이다. 이제 신들의 논쟁은 더 이상 아무의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

 

그는 씩 웃으면서, “Are we good? – 우리 괜찮은 거지?” 한다. 아, 또 저러는구나. ‘fine, okay’ 같은 고전적 표현 대신 ‘good’이라 하는구나. 요즘은 레스토랑에서 웨이터가 커피 더 하겠냐고 물어봤을 때도, ‘I am fine!’ 하지 않고 ‘I am good!’ 하는 세상!

 

‘God’와 ‘good’가 말뿌리가 같다는 학설을 나는 구독한다. 신은 좋은 것이며 좋은 것이 신이다. 그래서 ‘I am good’=’I am God’, ‘Are we good?’=’Are we gods?’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험난한 세상을 헤쳐 가는 사람들에게 명칭과 스타일이 저마다 다른 신들의 가호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 서 량 2021.05.16

뉴욕 중앙일보 2021년 5월 19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9366112 

 

 

[잠망경] 신(神)들의 논쟁

브루스가 내게 말한다. “나는 당신이 어떤 정신과 의사인지 모르기 때문에 당신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내가 신에게 몇 번을 직접 물어봤는데 당신이 처방하는 정신과 약은 백해무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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