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90. Crying in H Mart

서 량 2021. 6. 1. 12:03

 

당신과 내가 조그만 빨가숭이 갓난아기로 태어나서 말을 깨우치고 학교에서 글을 배우며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롭기만 하다.

 

사람의 발육과정에서 무엇이 잘못 됐을 때 일어나는 크고 작은 고통과 고난을 어찌하면 좋을까 싶다. ’Michelle Zauner’의 ‘Crying in H Mart, H마트에서 울다’를 읽으면서 가슴이 연거푸 찡하고 울컥거렸다.

 

이 회고록은 2021년 4월 20일 출간된 후 뉴욕 타임즈 논픽션 베스트 셀러 목록에서 한동안 2위를 차지했다. 미셸 자우너는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올 32세된 록싱어(rock singer). ‘H Mart’는 미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한국 그로서리 ‘한아름 마켓’이다.

 

미셸은 서울에서 출생 후 한 살때부터 오리건 주의 소도읍에서 자란다. 어머니는 미셸과 철두철미하게 가까움을 유지하지만 아버지는 거의 부재에 가깝다. 엄마의 까칠한 성격이 점점 더 부각되면서 딸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상을 겪는다. 딸도 녹록치 않은 기질로 맞서지만, 어쩌냐, 아이는 어른에게 늘 비참하게 패배 당하는 법이다.

 

엄마와 딸이 공유하는 무풍지대는 한국음식이었다. 엄마는 타고난 신념으로 한국음식을 추진하면서 딸의 식성과 입맛을 길들이고 결국 미셸은 음식 앞에서 엄마에게 고개를 푹 숙인다.

 

이 대목에서 H마트가 보무도 당당하게 무대에 등장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H마트는 한국인 이민자 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다른 여러 나라 이민자들에게도 육체와 정서의 공허감을 충족시키는 유일무이한 쉼터다.

 

미셸의 엄마는 2014년에 췌장암으로 유명을 달리한다.

 

미셸이 한국음식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에 애정이 간다. 그녀의 H마트를 토대로 한 정신적 성장은 기억 속의 엄마와 화해를 이루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경지에 이른다.

 

책 전반에 한국음식 냄새가 넘쳐 흐르면서 연신 군침이 도는 것은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라면, 비빔밥, 짜장면, 냉면, 삼계탕, 설렁탕, 떡볶이, 삼겹살, 된장찌개, 미역국, 쌈장, 생마늘! 책을 읽다가 책을 놓으면 책에서 한국음식 냄새가 난다. 우리가 구강성(口腔性)으로 똘똘 뭉쳐 있다는 생각이 솟는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뉴욕의 정신분석가 버트램 루윈(Bertram Lewin, 1896~1971)이 주장한 구강성(口腔性)의 3대 요소, ‘wish to eat, wish to be eaten, wish to sleep – 먹고 싶은 소망, 먹히고 싶은 소망, 자고 싶은 소망’을 여기에 소개한다.

 

마지막 조항은 내용이 복잡해서 설명을 피하지만 나머지 둘을 주목해 줬으면 한다. (소망이라는 단어를 욕망으로 바꾸면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 무엇을 먹는다는 일이 무엇에게 먹힌다는 일과 혼동이 일어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당신과 내가 무엇을 정복하고 싶은 만큼 그것에 정복당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경우를. 학문이건 예술이건 사랑이건 우리의 제반 정서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사람 마음에 그런 면이 있다.

 

미셸은 한국음식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엄마와의 심리적 평화를 성취한다. 비빔밥처럼 비벼진 사랑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엄마로 자신 스스로가 변신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과거와 현재의 혼합체가 쉬임없이 걸어가는 성숙의 길이다.

 

© 서 량 2021.06.01

뉴욕 중앙일보 2021년 6월 2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9406829 

 

[잠망경] Crying in H Mart

당신과 내가 조그만 빨가숭이 갓난아기로 태어나서 말을 깨우치고 학교에서 글을 배우며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롭기만 하다.. 사람의 발육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됐을 때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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