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41. 내 그림자

서 량 2019. 7. 15. 07:28

 

그룹치료를 하던 중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가장 바람직한 대화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긍정적(positive)인 생각이 최고라고 누가 덧붙인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면 저절로 긍정적인 말이 오갈 게 아니냐고 한마디 보태니까 좌중이 숙연해진다. 이들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여건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알고 있을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고린도 전서 13장 13절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 사랑이 제일 으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positive’는 사전에 긍정적이라는 뜻이 첫 번째로 나오고 확실하거나 낙관적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모두 다 한자어다. 순수한 우리말에는 ‘positive’라는 개념이 없었던 걸까. 사실 ‘positive’, ‘negative’, 긍정, 부정, 같은 말을 내뱉는 순간 당신은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다.

 

‘positive’는 14세기에 고대 불어와 라틴어에서 합의에 의하여 무엇을 어디에 ‘놓다’라는 의미였다. ‘자리매김’이라는 뜻에 제일 가깝다. 이 말은 한 사람의 ‘입장’을 뜻하는 ‘position’과 그 말의 뿌리가 같다.

 

‘positive’가 현대문명의 필수품인 배터리에서 마이너스, 플러스로 표기되는 음극, 양극처럼 전기현상에 도입된 것이 18세기경. 낙관적이거나 적극적인 성격을 뜻하기 시작한 시기는 아주 근래, 1916년이었다.

 

긍정(肯定)의 ‘긍’은 옥편은  ‘즐길 긍’이라 풀이한다. 당신이 믿기지 않겠지만, 두 번째 뜻으로 ‘뼈에 붙은 살’이라 나와있다. 중국인들은, 에헴, 뼈에 붙은 살을 뜯어먹는 것을 즐겼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오래 전 그들이 비즈니스 미팅에서 상대에게 ‘예스’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 만나 즐겁게 먹었을 것이다. 동치미 냉면 같은 허드레 음식이 아니라 최소한 LA갈비 정도는 나와줘야 협상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들 뿐만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 다 그렇다. 남녀가 데이트를 하는 광경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의 지성적인 결정과 취향은 우리의 입맛과 살코기를 음미하는 뱃속 사정에 딸렸다.

 

긍정이라는 한자어의 갈비구이 냄새는 그렇다 치고, 앞서 말했듯이 ‘positive’는 원래 ‘자리매김’이라는 중립적인 뜻이었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당신과 나는 ‘positive’라는 말을 매우 편파적으로 좋아하고 숭배하는 것 같다.

 

적극적인 사람에게 밀려서 소극적인 사람은 왕따를 당해도 좋은가 하는 문제, 밝은 성격의 소유자가 어두운 성향이 있는 사람을 제키고 득세를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따위가 거론된다. 배터리의 음극은 양극보다 전기적으로 하위급에 속하는가 하는 강력한 논쟁이 일어난다.

 

음극이 없는 배터리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세상 어디에도 영원한 밝음은 없다. 빛이 어둠을 필요로 하듯 선이 악을 기반으로 한다는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나 물체는 없다. 그래서 피터팬은 그림자가 발에서 찢어져 나갔을 때 웬디의 바느질 덕분에 다시 그림자를 붙이고 다니는 어린애의 정체성을 회복했던 것이다.            

 

오래 전에 “내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시를 쓴 적이 있다. 마지막 부분이 이렇다.

 

(전략)... 그는 찬 바람 몰아치는  봄밤이면/ 내 등때기에 바싹 들러붙어/ 내 육신의 명맥을 잘 이어주는/ 본심을 알 수 없는 동물이다// 지금 잠시 어디로 외출하고 없는/ 내 그림자가 그립다.//

 

© 서 량 2019.07.14

--- 뉴욕 중앙일보 2019년 7월 17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19/07/16/society/opinion/7429832.html

 

[잠망경] 내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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