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청에 시달리는 환자에게 묻는다. 정체를 모르는 목소리, 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여럿이 토론을 하다가 의견충돌을 일으키는 목소리들, 더구나 남을 해코지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그들의
압력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고 묻는다.
환자가 대답한다. 목소리에게 대들기도 하지만 대개는 못들은 척 한다는 것! 심지어 목소리가 시키는 일이 있으면 그러겠다 해 놓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는 것!
이 환자는 목소리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법을 터득한 것 같다. 그는 자신의 내부 상황과 벽을 쌓고 지낸다. 그 벽은 혼동과 선동을 불러 일으키는 악의에 찬 자극을 차단한다. 한 국가로 치면, 이것은 외적의 침입이 아니라 질이 나쁜 내부 세력이 난동을 일으키는 정황이다. 이 사악한 내부 자극이 끝내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숙이게 되면서 세력의 균형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한다. 환자는 그런 벽이 필요하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첫 번째 벽이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어느 병동에서 응급상황이 터졌다고 크게 알려주는 확성기 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정신병원은 워낙 그런 곳이다. 그 순간 나는 무슨 일을 하다가 수 초 동안 집중력이 흐려진다. 위기에 처한 병동이 내가 일하는 건물이 아닌 다른 건물에 있으므로 관례에 따라 그 곳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솟는다. 나는 의식의 초점을 맞추기 위하여 외부 자극을 차단하려 한다. 프라이버시는 물론 정신집중을 촉구하는 보호벽이 나는 필요하다. 이것이 두 번째 벽이다.
세 번째는 시간을 뛰어넘어 들이닥치는 심리적 자극을 막는 방어책이다. 성장의 아픔과 상처가 오래 쌓여온 과거라는 자극에서 당신과 나를 보호해 주는 벽이다.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은 누구나 다 트라우마가 있다. 행복했던 과거를 향한 그리움조차도 상황이 달라진 현재를 뼈아프게 일깨워주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과거의 유령이 날아다니는 음산한 바람을 막아주는, 그런 세 번째 벽이 우리는 필요하다.
정신분석과 자아 심리학에 ‘자극 장벽 (stimulus barrier)’이라는 개념이 있다. 생명체는 내적 혹은 외적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사람은 물론, 멸치떼, 새떼, 물개, 그리고 사자나 코끼리 같은 야생동물들도 집단적으로 자신들을 방어하려 한다.
세포막, 달걀 껍질, 사람의 피부, 그리고 장미의 가시 같은 것들이 자극 장벽의 예다. ‘썸남썸녀’의 남녀가 뜨거운 관계로 진전하기 전까지 쌍방의 바운더리를 잘 지켜주는 것도 서로를 위한 보호책이며, 국가간에 국경선이나 비무장지대가 존재하는 것도 같은 이론이다.
우리는 생물체로서 자극 장벽이 부실하거나 무너졌을 때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감염을 받은 위기에 놓인다. 컴퓨터도 악질적인 외부 자극, 해킹을 차단하는 방화벽이 있어야 바이러스의 침범을 방지할 수 있다.
‘stimulus’는 17세기 말 라틴어로 뾰족하다는 의미였고 막대기라는 뜻의 ‘stick’과 어원이 같다. 남을 들들 볶는다는 뜻 또한 있었다. 그 시대 서구인들은 막대기로 남들을 선동하거나 못살게 굴었던 것이다. 옛날 옛적 모세와 히포크라테스도 지팡이를 들고 다닌 걸 보면 인류의 지도자들은 남들을 막대기로 가르쳤던 모양이다.
‘barrier’도 고대불어에서 막대기, 혹은 빗장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stimulus barrier’라는 개념은 막대기에 대한 이야기다. 자극도 막대기에서 오고 자극을 막는 도구도 막대기다. 중세기 무사들의 칼 싸움과 스타워즈의 레이저 검이 윙윙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치는 장면이 떠오른다. ‘자극 장벽’은 쌍방이 목숨을 건 싸움이
다. 한쪽이 대결을 마다하고 평화를 제의하는 순간에 처절한 패배의 평화가 찾아 올 것이다.
© 서 량 2018.10.21
--- 뉴욕 중앙일보 2018년 10월 24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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