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 상영된 공상과학 영화 ‘Arrival’을 보았다. 주인공이 언어학자이고 사피어 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에 대한 대사가 나온다는 인터넷 글을 읽고 뒤늦게 흥분하며 보았다.
오래 전부터 언어학자 사피어(1884~1939)와 워프(1897~1941)가 주창한 ‘언어 결정론(linguistic determinism)’을 신봉해 왔다는 점을 차제에 고백한다. 딱히 내가 시를 쓰기 때문이 아니라 내게 있어서 그것은 ‘가설’이 아닌 ‘상식’이다. 생각이 말을 지배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 생각을 매듭짓고 결정하는 일도 너끈히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김소월도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하며 「가는 길」에서 읊조리지 않았던가.
영화 속 외계인의 문자는 영어나 우리말 같은 표음문자가 아닌 한자 같은 표의문자에 가깝다. 표기 방법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직진하지 않고 한 폭의 그림처럼 총체적 이미지를 전달하면서 생각 하나하나가 독특한 원형 구조를 이룬다. 그렇게 우리도 생각을 한눈에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옛날에는 외계인과의 의사소통을 테마로 한 영화가 거의 없었다. 지구를 침범할 목적으로 비행선을 몰고 온 화성인들과 미국인들이 전쟁을 벌이는 소재가 고작이었다. 그때는 화성인들을 전멸시킨 후 전인류가 스스로의 생존과 번영을 축복하는 장면이 말미를 장식했던 시절이었다.
왜 그럴까. 외계인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무슨 까닭에 적대감과 공격심이 부글거리는 투쟁의식의 도가니를 마다하고 이제 서로의 언어를 파악하려는 경건한 예식을 치루는가.
정신분석학의 ‘대상 관계론(對象 關係論, Object Relations Theory)’은 유아기의 첫 해를 크게 두 시기로 나눈다. 처음 6개월을 ‘paranoid-schizoid position(편집-분열성 포지션)’이라 하고 다음 6개월을 ‘depressive position(우울성 포지션)’이라 부른다.
유아의 기본적 정신상태는 생후 1년이 지나면 대충 마무리를 짓는다고 대상 관계론은 가르친다. 이 두 포지션은 다시 평생토록 무시로 반복되면서 순간순간 수시로 자리바꿈을 거친다.
편집-분열성 포지션은 대상과의 갈등과 피해의식에서 오는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린다. 아기는 간간 엄마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면서 모종의 투쟁의식을 키우기도 한다. 화성인들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 때문에 그들과 목숨을 걸고 싸웠던 미국인들의 심리가 바로 편집-분열성 포지션이었다. 그것은 실로 미개한 의식상태였다.
대상 관계론은 인간의 마음이 성취하는 최상의 경지를 ‘우울성 포지션’이라 손꼽는다. 아기는 세상이 자기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우울한 깨달음에 사로잡힌다. 소통의 대상인 엄마가 독립적인 존재임을 겸허히 인정한다. 영화에서 외계인과 언어학자는 성심성의로 의사소통에 뜻을 모은다.
‘arrival’은 원래 12세기에 고대 불어와 라틴어로 ‘바다에서 육지에 도착한다’는 의미였다. 14세기에야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에 도달한다는 보편적 뜻으로 변했다. ‘arrival’에는 폭풍을 무릅쓰고 천신만고 끝에 항구에 도착하는 선박의 울부짖는 뱃고동 소리가 깊숙이 스며있다.
한국에서는 이 영화에 ‘컨택트’라는 제목을 붙였다. ‘도착’이라는 원문에 충실하고 여유 있는 번역 대신에 ‘접촉’이라는 감각적인 단어를 그것도 쿨하게 영어를 쓴 언어학적 속임수가 마음에 걸린다. 감성을 자극하는 교묘한 말장난이다. 이것을 우울성 포지션에 입각해서 묵묵히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가끔씩 고개를 드는 내 편집-분열성 포지션에 자리를 잡은 후 눈에 쌍심지를 품고 싸움을 걸어볼까 말까, 하며 목하 고민 중이다.
© 서 량 2018.10.08
--- 뉴욕 중앙일보 2018년 10월 10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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