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21. 혼동의 저주

서 량 2018. 9. 24. 04:28

한 사람의 비정상적인 행동은 누구나 얼른 알아차릴 수 있으므로 나는 환자의 말이나 말버릇에 더 큰 관심을 쏟는다. 40여년을 정신과 환자를 보다가 진단명 없이 그들의 증상을 얼추 두 부류로 구분하는 습관이 생겼다.

 

첫째는 기분장애 (mood disorder)’ 증상. 누구든지 쉽게 상식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둘째로는 사고장애 (思考障碍, thought disorder)’ 증상. 눈에 보이지 않는 사고장애는 환자가 하는 말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 정도가 심해서 그가 늘 습관적으로 횡설수설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언성을 가다듬고 환자의 정신상태에 관하여 확신 있는 발언을 하기 위해 입술에 침을 바를 것이다.    

 

그러나, 경미한 사고장애가 알게 모르게 있거나 혹은 누가 얼토당토않은 발언을 가끔씩 띄엄띄엄 한다면 어쩔 것인가. 게다가 기분장애와 사고장애 증상은 서로 많이 겹쳐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엊그제 환자들에게 ‘thought disorder’가 뭐냐고 물었더니 누군가 대뜸 “Not making sense. (말도 안되는 말하기)”라 한다. 그렇다면 “Making sense. (말의 앞뒤가 맞기)”는 뭐냐고 재차 물었다. 자칫 말장난에 빠질 수 있다 싶으면서도 기왕지사 갈데까지 가보자는 심산에서.

사람이 앞뒤가 맞는 말을 하려면 무엇보다 생각과 생각이 어느 정도 연결돼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특히 저 혼자만이 하는 생각과 생각 사이의 연결보다는 남과 자기 사이에 생각의 연결이 있어야 하고, 만약 그런 연결이 전혀 없다면 대화가 도저히 불가능하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말도 안되는말은 결코 보편적인 생각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점 또한 역설한다. (그런 아슬아슬한 발상과 발언을 거의 고의적으로 하는 시인들이 땀 흘리며 쓰는 현대시도 교묘한 사고장애의 줄타기가 창출하는 언어의 곡예다.)

어쩌다가 참 어려운 화제를 다룬다 싶었던, 그날도 그랬다. 그때 어느 분열증 환자가 뇌까린다. “The twin towers were destroyed because they were spending too much electricity.” (“쌍둥이 빌딩은 전력 소모가 심해서 파괴당한 겁니다.”)

이렇게 앞뒤 문맥과 상관없이 하나의 생각이 독립적으로 황당무계한 것도 사고장애다. 그 말이 나오자 환자들은 방이 떠나라고 웃었다. 말도 안되는 유머는 사고장애에서 올 때가 많다.

누군가가 사고장애는 ‘confusion (혼동)’에서 오는 것이라 말한다. 너희들은 예컨대 무엇과 무엇이 헷갈리느냐 하는 질문을 던진다. 꿈과 현실, 선과 악, 혹은 환청이 있을 때 그 목소리가 진짜냐 가짜냐, 하는 좋은 본보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그들의 무반응에 좀 실망한다.

‘confusion’이 라틴어로 함께 섞기 (con + fusion)’라는 의미였다는 사실은 어원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얼른 짐작이 갈 것이다. 고대영어에서 온 쉬운 말로 ‘mix-up’이 있는데 생각이 엉망으로 섞여서 혼란스럽다는 뜻이다.

사고(思考)와 언어의 발달과정에서 인류는 이질적인 사물이나 현상을 섞어 놓고 혼동에 시달렸던 것이다. ‘confusion’과 말뿌리가 같은 ‘confound (당혹스럽게 만들다)’가 있다. 이 말을 구닥다리 간투사로 써서 ‘Confound you!’ 하면 망할 자식! 빌어먹을 자식하는 욕과 저주가 된다. ‘confusion’에는 서로 다른 것들이 함부로 얼싸안고 합쳐지면 혼동이 오고 망한다는 저주가 숨어있다. 이질적인 것들끼리 엮이고 섞이면 한쪽이 다른 쪽을 잡아먹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감성과 이성이 있는 사람과 광물에 지나지 않는 자석의 차이다.

© 서 량 2018.09.23 

--- 뉴욕 중앙일보 2018년 9월 26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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